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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목 빠지겠네' 韓댄서에 충격..北출신 무용감독 "최승희 계보 잇겠다"
글쓴이 문화재방송.한국 등록일 [2020.11.13]

'목 빠지겠네' 韓댄서에 충격..北출신 무용감독 "최승희 계보 잇겠다"

[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주성하 기자 입력 2020.11.13. 13:59 수정 2020.11.13.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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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창작한 장고춤을 무대에서 추고 있는 최신아 씨. 최신아 단장 제공
2015년 9월 전북 남원에서 열린 ‘국민대통합 아리랑공연’ 한복 패션쇼는 기존과 다른 연출을 선보였다. 한복을 입은 모델들이 워킹 중심의 기존 패션쇼와는 달리 민요의 흥겨운 선율에 맞춰 우아한 춤을 추며 등장한 것이다.

무대 뒤에서 한 중년 여성이 차례를 기다리는 모델들에게 몸짓을 해가며 열정적으로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너는 무대 중심에서 세 걸음 더 나간 뒤 돌면서 손가락을 이렇게 쥐고 관객을 쳐다보며 퇴장해. 퇴장할 때 새로 들어오는 친구랑 눈을 맞추면서 무릎 살짝 굽히며 인사하고….”

설명을 들은 모델이 무대에 올라간 뒤 그는 다음 모델에게 “이 지점에서 둘이 헤어진 뒤 후렴 두 번째 박자에 모자를 벗어 옆구리에 대고 반쯤 돌아서”라는 식으로 설명을 했다.

그녀는 북에서 온지 3년째 된 최신아 씨다. 이날 공연은 북한에서 함경북도예술단 무용감독을 지냈던 그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안무를 선보인 자리였다.

“전날 저녁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한복 패션쇼는 민요에 맞춰 했으면 좋겠는데, 나보고 안무를 맡아달라는 거예요. 너무 황당했죠. 당장 내일이 공연이고, 심지어 음악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어요. 이렇게 빠듯하게는 못한다고 하자 주최 측에서 ‘창작도 가능하다면서요? 즉흥적으로 한번 해 보세요’라고 하더군요.”

최 씨는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 좋아. 북한에서 27년 동안 무용을 했던 자존심을 걸고 해보자.’

음악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모델 11명의 동선을 그렸다. 그런데 행사 당일 갑자기 모델이 16명으로 늘었다. 구도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모델들은 대다수 민요를 전공한 20대 여성들로 무용과 구도의 개념이 없었다. 그들을 데리고 한나절 사이에 동작을 가르치고, 개별적으로 무대에 오를 때, 두세 명씩 오를 때, 단체로 오를 때 해야 할 동작들을 가르쳤다. 시간이 급박해 공연 진행 중에도 그는 모델들에게 무대에 오르기 전에 동작을 다시 가르쳐야 했다. 그렇게 급히 진행한 패션쇼가 1500명 관객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으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을 때 그는 탈북 이후 처음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주최를 맡았던 한 인사가 공연이 끝난 뒤 말했다.

“대단한 실력인데, 너무 아까워요. 예술단 하나 만들어보면 어때요. 밀어드릴게요.”

그렇게 2015년 11월 최신아 예술단이 만들어졌다. 최 씨가 오디션에 온 80명의 후보 중 5명을 뽑아 만든 예술단이었다. 이는 북한에 이어 한국에서 무용 경력을 새롭게 쌓는 계기가 됐다.

부채춤을 추고 있는 최신아예술단. 최신아 씨 제공

#12살 때 시작한 춤

최 씨는 1969년 평양에서 예술영화촬영소 간부의 딸로 태어났다. 6.25전쟁 때 나이를 두 살 숨기고 군에 입대한 부친은 정찰병으로 뽑혀 17살 때 부산까지 가 본 것을 자식들에게 두고두고 자랑했다.

최 씨가 춤을 시작한 계기는 우연이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던 최 씨는 소학교(초등학교) 때부터 배구선수로 활동했다. 그런데 중학교에 진학한 1981년 그의 학급이 ‘2중 영예의 붉은기’ 학급으로 지정돼 평양학생소년궁전 가야금 소조반으로 통째로 뽑혀가게 됐다. 학생소년궁전에서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워낙 활동적이었던 그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루는 어디선가 들리는 장단소리에 끌려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가 몰래 들여다보니 자기보다 훨씬 큰 언니들이 무용을 하고 있었다. 너무 멋져 보였다. 그는 담임선생에게 가야금 대신 무용을 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무용선생은 아래위로 최 씨를 훑어보고 몇 가지 동작을 시켜보았다. 남달리 큰 키에 팔과 목까지 길고 유연성과 청각이 좋았던 최 씨는 그 자리에서 무용소조로 결정됐다. 그렇게 무용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82년 최 씨 가족은 함북 청진으로 추방됐다. 둘째 오빠가 패싸움에 여러 차례 가담하는 등 평양에서 물의를 일으켜 온 가족이 평양에서 쫓겨난 것이다.

청진에 온 최 씨는 평양학생소년궁전 경력을 인정받아 청진예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이 학교의 무용선생인 김응범은 ‘전설의 무희’ 최승희의 제자였다. 그가 키운 학생들은 피바다예술단, 만수대예술단에서도 주인공으로 활약했다.

훈련은 혹독했다. 하루에 8~10시간은 기본이었다. 매일 기초훈련을 두 시간 한 뒤 10분 쉬고 발레를 한 시간하고, 다시 조선무용을 한 시간한 뒤 작품 훈련에 매진했다. 집단체조 강국을 자처하는 북한은 무용만큼은 어딜 가나 혹독하게 가르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힘든 훈련을 이겨내며 기량을 인정받은 최 씨는 예술학교 전문부를 졸업하고 17세 때인 1986년 함경북도예술단 무용수로 임명됐다. 젊은 시절엔 평양을 수시로 오가며 김일성과 김정일 등이 참석하는 공연에 수시로 참가했다. 1989년 평양에서 열린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때는 유명 예술단원들과 함께 각국 입장 팻말을 들고 가는 요원으로도 뽑혔다.

“그랬다면 지금 다큐에서 제 얼굴을 찾아볼 수 있을 건데, 아쉽게 입장을 못했어요. 제가 상투메 프린시페를 담당했는데, 온다고 했던 대표단이 안 왔거든요.”

최 씨는 2008년 탈북할 때까지 예술단에서 22년 동안 무용을 했고, 예술단 무용 감독까지 맡았다. 26세 때 3급 예술인으로 승진해 ‘65호 국가 특별공급대상’으로 인정받았다.

북한은 예술인들에게 6급에서 시작해 1급까지 급수 제도를 운영한다. 신인은 6급이고, 2급은 공훈예술인에게, 1급은 북한 예술인의 최고 영예라는 인민예술인 칭호를 받아야 부여한다. 3급부터는 따로 정한 공급소에 가서 쌀과 부식물, 계란, 기름, 당과류 등을 특별히 받게 된다. 그만큼 3급은 예술인들이 받기 어려운 급수였다.

자신이 창작한 무용을 선보이고 있는 최신아 씨. 최신아 씨 제공

# 남조선을 만나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은 예술인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어쩌면 뇌물을 받을 수 있는 권력이 전혀 없는 예술인이 제일 큰 피해자라 할 수 있다.

허기진 사람들에게 무용은 사치였다. 예술인들도 출근해 3시간만 훈련하고 오후에는 장마당에 나가 장사를 해야 살 수 있었다. 훈련 밖에 모르던 최 씨도 이때 장사에 눈을 떴다.

2006년 그는 처음 중국에 나왔다. 중국에 외삼촌이 살고 있어 합법적으로 여권을 받아 친척 방문으로 나올 수 있었다. 처음 와본 중국은 최 씨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았다. 2008년에 또 친척방문을 구실로 여권을 떼어 중국에 왔는데, 이때는 아예 작정을 하고 6개월 동안 체류하며 돈을 벌기위해 나왔다.

부모가 한국에 간 어느 조선족 집에서 어린 아들을 봐주는 가사도우미 자리를 얻었다. 이때 그는 처음 인터넷을 알게 됐다. 한국 무용이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

“설운도, 태진아, 김세레나 같은 가수들의 공연을 보았는데 백댄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어머나, 저렇게 추다가 목이 빠지겠다’고 생각했어요. 백댄서들이 치마저고리 입고 나와 무대 위를 뛰어다니는 걸 보고 ‘저건 웬 괴상한 춤이냐’고도 생각했죠. 그때 내가 한국에 가면 안무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들었어요.”

어느 날 평양예술단 공연 영상도 보았다. 그 예술단은 탈북민들이 서울에서 만든 예술단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몰랐던 최 씨는 ‘우리나라에서 서울에 저런 예술단도 보냈나’하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최 씨의 마음에 점점 ‘한국에 가서 북한 무용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그러나 그에게 한국의 이미지는 북한에서 교육받은 대로 ‘썩고 병들고, 화염병이 난무하고, 예쁜 여성들이 길거리에서 총에 맞는 곳이고, 저녁에 안보이면 죽었다고 간주하는 곳’이었다. 한국에 가면 신변안전이 절대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 믿었다.

“북에서 예전에 직장마다 ‘선동원’ 제도를 만들 때 저는 우리 예술단의 최초 선동원으로 임명받았어요. 출근하자마자 200여명의 동료들을 모아놓고 ‘당의 부름을 받고 시작하는 오늘 하루를 충성을 바치고 양심의 땀을 흘리자’고 선동하는 일이었죠. 썩고 병든 자본주의 날라리 풍에 절대 물들면 안 된다고 선전하는 일도 제 몫이었어요. 그러다보니 어느 새 제 머리 속에 남조선은 정말 무서운 지옥이란 개념이 있었던 것 같아요.”

돌봐주던 아이의 부친은 한국에서 자주 전화를 해왔다. 그는 한국이 절대 그런 세상이 아니라고 계속 이야기했다. 하지만 최 씨는 ‘원래 자본주의 보도란 조작’이라며 믿지 않았다.

6개월만 돈을 벌고 북에 돌아간다던 계획은 어그러졌다. 중국이 마음에 들고, 일도 편하고 주변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눌러앉은 기간이 길어지더니 어느새 3년을 넘겼다. 그때 위기가 찾아왔다.

# 탈북

2011년 9월 어느 날 새벽에 전화가 걸려왔다.

젊은 남자가 대뜸 반말로 “야, 너 조선여자인거 모를 줄 알았나. 공안에 신고해 잡아가게 할 거야. 북에 가면 어떤 꼴이 날지 상상해봐”라며 협박을 했다.

“돌봐주던 아이의 사촌 누나와 사귀던 남자친구였어요. 그런데 둘이 헤어지고 여자아이가 잠적했죠. 그랬더니 남자친구가 계속 전화를 해 여자 간 곳을 불라는 거예요. ‘모른다’고 했더니 어느 날 신고하겠다고 협박을 한 거죠.”

“난 여권 떼고 온 여자니 신고할 테면 해봐”라고 대답은 했지만 3년째 불법체류 중인 처지라 신고하면 북송돼 고초를 겪을 게 뻔했다. 서울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더니 ‘한국 오는 브로커를 찾아줄 테니 지금 집을 나와 연길역으로 가라’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아침 6시에 정말 몸만 빠져나와 역에 갔더니 정말 브로커가 마중 나와 있더군요. 그런데 북에서 막 건너온 젊은 친구 3명과 한 팀이 됐어요. 기차 타기 전까지 일행이 누군지 몰랐는데 역 앞에 나가보니 나무 밑에서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는 얼굴들이 표가 나서 3명이 누군지 보자마자 다 알아버렸죠.”

기차에서 신분증을 검열할 때면 벙어리 시늉을 하며 위기를 넘겼다. 중국에서 동남아 국가로 넘어갈 때는 열대 숲을 헤치며 6시간 동안 줄곧 산을 오르기도 했다.

“같이 오던 어린 여자애가 더는 못 간다며 여기서 죽겠으니 버리고 가라는 거예요. ‘죽더라도 엄마한테 가서 죽어’라고 달래며 그 애를 업고 산에 올라갔죠. 제가 그렇게 힘들게 무용 훈련을 했지만, 땀이 이마에서 정말 비처럼 쏟아질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당시는 탈북민이 한해에 3000명 가까이 한국에 오던 시절이었다. 태국 감옥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모든 것이 가장 열악한 때였다. 그 모든 것을 견디고 2011년 11월 한국에 입국했고, 2014년 4월 한국 사회에 나왔다.

사회에 나왔지만 딱히 할 일은 없었다. 낮에는 식당에 나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십자수를 놓으며 3년을 보냈다. 무용에 관심이 있었지만 마흔 다섯이 된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던 2015년 8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국민대통합 아리랑 순회공연을 하면서 무용을 전공한 탈북민을 수소문했는데 북에서 무용 감독을 했다면서요?”

그렇게 그는 한국 무대에 서게 됐다. 북에서 온 무용수로 소개돼 독무를 시작했는데, 장고를 끼고 혼자 무대를 휘젓는 그를 보고 모두가 ‘대단하다’며 박수를 쳤다. 한달이 되니 갑자기 하루 만에 남원 패션쇼 안무를 맡아보라는 제안까지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무용단까지 만들게 됐다.

한 지방공연 무대에 선 최신아예술단. 장고를 메고 무릎을 끓은 이가 최신아 씨이다. 최신아 씨 제공.

# 최승희의 계보

중국에 있을 때 최 씨는 TV에서 한국의 무용을 보다가 많이 놀랐다고 했다.

“저건 북한의 기초(기본) 동작으로 무대에 나와서 왜 연습하지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연습이 아니라 작품이라더군요. 그런데 북에선 그런 기초 동작을 완전히 익힌 다음에 작품을 하거든요.”

1987년 북한은 ‘자모식 무용표기법’이란 것을 발표했다. 춤 동작과 구도 등 모든 형상 요소들을 일정한 기호로 악보와 함께 표기하는 방법이다. 무용표기법만 있으면 세계 어느 나라에 있던지 똑같은 선율에 똑같은 춤동작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백조의 호수’와 ‘마주르카’ 같은 유명 무용도 표기가 가능하다. 현재 무용계에서 통용되는 ‘라반표기법’보다 정교하고 풍부한 무용 동작을 표기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그런데 왜 이 표기법은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최 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걸 활용하려면 엄청 많은 것들을 배워야 합니다. 각각의 무용뿐만 아니라 음악의 악보, 장단, 청음까지 기본으로 알아야 하는데, 여기는 그렇게까지 엄하게 훈련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춤은 전통무용, 현대무용, 발레, 뮤지컬, K팝으로 나뉘죠. 그런데 전통무용은 발레를 좀 아는데 현대무용을 모르고, 현대무용은 발레를 아는데 전통무용을 모르고, 발레는 현대무용은 아는데 전통무용을 모르더군요. 북에선 무용과에 들어가면 전통무용, 현대무용, 발레를 동시에 1전공으로 가르칩니다. 거기에 음악의 청음, 장단, 악보까지 모두 전공으로 교육하죠.

북에서 집단 체조할 때 어린 학생들도 고난도의 동작을 일사불란하게 합니다. 일반 학생들도 그렇게 훈련시키는데, 전공과는 얼마나 훈련시키겠어요. 무용만큼은 북한이 훨씬 더 빡세게 배우는 셈입니다.”

다만 북한의 무용은 획일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최 씨는 “한국의 전통무용은 유명인 중심의 여러 계파로 갈라져 지방마다 특색이 다 다른데, 북한 무용은 최승희 단일파라 할 정도로 철저히 최승희 무용의 영향권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최승희는 1969년 북한에서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그의 춤은 다시 복권되기 시작했고, 그의 유해도 애국열사릉에 안치됐다. 2011년 11월 북한은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가 1956년에 창작한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를 리메이크해 무대에 올렸고, 노동신문에서 ‘조선무용예술의 1번수’ ‘조선의 3대 여걸’ 등으로 극찬하기도 했다.

무대에서 화려한 전통무용을 선보이고 있는 최신아 씨. 최신아 씨 제공

# 최신아 예술단

자기 이름을 내건 예술단을 만든 뒤 최 씨는 열정적으로 단원들에게 자기만의 무용을 전수했다. 얼마 안 돼 업계에는 “최신아 예술단에 들어가면 너무 빡세다”는 소문이 났다.

처음에는 단원들과의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고생했다. 북한에서 쓰는 무용 용어가 여기선 거의 통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 씨가 한참을 열심히 설명하고 해보라 하면 단원들이 자기들끼리 얼굴을 쳐다보며 “뭐래?”라고 속삭였다. 처음에는 자기를 무시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정말 이해하지 못해 그런 거였다. 최 씨는 집에 들어가면 한국 용어를 공부했다. 그런데 지금도 지시를 할 때 불쑥불쑥 북한 용어가 튀어나와 고생이라고 털어놓았다.

무용단을 데리고 공연을 다녔더니 이번엔 그의 단체가 탈북예술단체라고 소문이 났다. 단원들은 어딜 가나 자기들을 탈북자로 취급한다며 불만이 컸다.

그래서 공연 때마다 최 씨가 무대에 나가 일일이 해명해야 했다.

“저희 무용단은 저만 북에서 왔지 단원들은 한국에서 무용을 전공한 경력자들을 오디션을 뽑아 만든 전문적인 무용단입니다.”

방송에 출연하고, 국가 차원의 공연도 참가하면서 3년쯤 지나자 관객들이 아래에서 자기들끼리 “탈북예술단이라니까” “아니야, 단장만 탈북했다잖아” 이러면서 싸우는 수준까지 인지도가 높아졌다.

초기 최 씨는 한국 사회에 너무 무지했다. 후원자는 단원 월급은 지급했지만 최 씨의 월급은 주지 않았다. 공연 수익 전액을 가져갔다. 최 씨는 처음 2년 동안 한 푼도 벌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이름만 자기 예술단이지, 수익은 남의 것이 됐던 것이다.

결국 그는 2018년 독립을 선언했다. 고맙게도 단원들이 따라와 주었다.

지난해 최 씨는 자기 이름을 딴 무용연구소도 만들었다. 이제는 일본, 중국 등에서 그에게 무용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제자도 생겼다.

# 최신아의 꿈

무용으로 한국 사회에서 승부를 본지 5년차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최신아란 이름이 한국 무용계에도 알려지고, 단원들도 최신아 예술단에서 무용을 배웠다면 경력으로 인정받게 됐다. 여기저기서 함께 공연하자는 제안도 들어온다.

그러나 올해 터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최 씨의 예술단에게도 타격을 줬다. 예약됐던 공연들이 줄줄이 취소됐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도 없었다.

지난해엔 해외에서도 초청받아 러시아와 인도에서 공연했는데, 올해는 예술단의 활동 범위를 해외로 넓히려는 시도마저 좌절됐다. 요즘 최 씨는 무용연구소 중심으로 제자들을 키워내는데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이 연구소에 가면 북한처럼 학생들에게 장단과 악보를 가르치고 기초 동작을 익히는데 중점을 둔다.

“저는 한국춤의 장점과 북한춤의 장점을 결합해 한반도 평화의 춤을 만들고 싶어요. 무용도 70년 넘게 분단이 돼 남북의 차이가 너무 커졌어요. 저는 북에서 27년을 무용만 했고 한국에 와서도 5년째 무용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전통춤은 속도가 느린 반면 북한 춤가락은 매우 빠르거든요. 앞뒤에 북한처럼 빠르고 경쾌한 춤을 넣고, 중간에 한국의 춤가락을 넣으면 이것이 최신아만의 고유의 춤, 나아가 최승희 무용의 계보를 이으면서 남북의 장점을 결합한 새로운 무용 사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미 최 씨는 최승희의 ‘무희춤’을 계승한 ‘쟁강춤’, ‘평양장고춤’ 등 여러 작품을 자신만의 특색을 입혀 창작했다.

그의 정착과 더불어 6년 전 북에서 데리고 온 딸도 잘 적응했다. 처음엔 대학에 가도 친구가 없다며 북한으로 다시 가겠다고 떼를 썼지만 이제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에서 수십 만 구독자와 팔로워를 거느린 인플루언서가 돼 하루하루 바쁘게 살고 있다.

최 씨는 요즘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한국에 온 게 정말 잘한 것 같아요. 무용만 하면 저는 행복해져요. 여기선 죽을 때까지 무용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의 얼굴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한국에서 무용을 다시 시작한지 5년 만에 저렇게 행복한 표정이니, 그의 얼굴이 10년, 20년 뒤에는 어떻게 바뀔지 궁금해졌다.

74년 전 전통 무용과 현대 무용의 용합을 시도해 신무용을 창시한 천재 무용가 최승희는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 숱한 제자들을 키워냈다. 반세기가 넘게 지난 뒤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무용 감독 최신아는 한국 무용계에 어떤 족적을 남길까. 단절된 남북의 무용을 다시 합치겠다는 최 씨의 꿈은 서울에서 이뤄질까.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원문보기

https://news.v.daum.net/v/20201113135917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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