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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유네스코 세계유산 남한산성을 돌아보며 삼전도의 치욕을 되새기다
글쓴이 tntv 등록일 [2018.06.21]





남한산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확정.. 11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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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행궁. /사진=뉴스1




경기 광주시에 있는 남한상성(사적 제 57호)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한국의 11번째 세계유산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22일 오후(한국시간)
카타르 도하의 국립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 38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남한상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이번 남한산성의 등재 결정으로 한국은 1995년 12월 9일 석굴암·불국사, 해인사장경판전, 종묘 3건이 처음 등재된 이래 모두 11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한국은 문화유산으로 첫 3건과 함께 종묘, 창덕궁, 수원화성, 경주
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 조선왕릉, 하회·양동마을이 있고 자연유산으로 제주 화산섬·용암동굴이 지정돼 있다.

세계유산은 1972년 세계유산협약에 근거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되어야 할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해 선정한 문화재로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으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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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동문(좌익문). /사진=뉴스1



남한산성은 동아시아에서 도시계획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증거가 되는 군사유산이라는 점과 지형을 이용한 축성술, 방어전술의 시대별 층위가 결집된 초대형 '포곡식'(包谷式·계곡을 감싸고 축선된) 산성이라는 점 등이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또 효과적인 법적 보호 체계와 보존 정책을 비롯해 현장에서의 체계적인 관리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는 것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문화재청은 전했다.

남한산성은 2011년 2월 문화재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추진 대상으로 선정된 뒤 2011년 1월부터 등재신청서를 작성해 2년 뒤인 2013년 1월 유네스코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후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CIOMOS)가 2013년 9월 방한해 현지 실사를 마친 뒤 추가자료 요청과 답변 과정을 거쳐 지난 4월 '남한산성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에 대한 평가 결과보고서'에서 '등재권고'로 평가해 유네스코에 제출했다.

세계유산위원회 자문기구인 이코모스(ICOMOS,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평가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남한산성은 세계유산이 되기 위한 조건 중 등재 기준 (Ⅱ)와 (Ⅳ)를 충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등재기준 (Ⅱ)는 '특정 기간과 문화권 내 건축이나 기술 발전,
도시 계획 등에서 인류 가치의 중요한 교류의 증거'를 보며, 등재기준 (Ⅳ)는 '인류 역사의 중요 단계를 보여주는 건물, 건축,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탁월한 사례'에 대한 것이다.

한편 남한산성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확정되자 네티즌들은 "남한산성, 등재 확정됐구나", "남한산성아 축하한다", "남한산성, 우리 문화유산 오래오래 보존되길", "남한산성 등재,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 "남한산성 등재, 진짜 잘됐다", "남한산성, 11번째구나. 잘 보존합니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출처:머니투데이 스타뉴스
기사원문보기:
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4062215475793796&outlink=2&SVEC


치욕의 역사가 숨쉬는곳,남한산성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오늘날의 남한산성은 인조 2년(1624)부터 축성되어 인조 4년(1626)에 완공 되었으며,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숭열전, 청량당, 지수당, 연무관 등이 들어서

수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지화문(至和門)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 할때 지화문이라 칭하였고 4대문중 가장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며

유일 하게 현판이 남아 있다.

 

 

 

 

 

 

제6암문(서암문)暗門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 하지 않았다.

인조 15년(1637년)1월 23일 한밤중에 쳐들어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 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 라 부른다

 

수어장대와 청량당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호,제3호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목적을 위해 지은 누각이다.

남한산성에 있는 5개의 장대중 유일 하게 남아 있다.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연주봉옹성(連珠蜂 甕城)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 하기 위해 한겹의 성벽을 더둘러 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 한다. 남한산성에는 5개의 옹성이 있다.

 

 

 

행궁

남한산성에는 유사시 임금이 피난 할수 있도록 행궁 시설을 건립 하였다.

그와 더불어 종묘와 사직을 모실수 있도록 좌전과 우실을 마련 하였다.

 

 

 

 

 

 

동문(東門)

남한산성에는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동문은 성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남문과 함께 가장많이 사용했던 문이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묘사된 병자호, 청태종은1636년 12월 1일 12만 대군을 심양에서 모아 조선을 침입하였다 / 사진 = 영화 '최종병기 활' 캡쳐 영상]

 

남한산성과 병자호란


청태종은 몸소 전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1636년 12월 1일에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군(漢軍) 2만 등 도합 12만의 대군을 심양에 모아 조선 침입에 나섰다.


9일에 압록강을 건너 다탁은 전봉장(前鋒將) 마부태에 명해 바로 서울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마부태는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수비하고 있음을 알고, 이를 피해 밤낮을 달려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서울에 육박하였다.

 

13일 오후 늦게 청군은 이미 평양에 도착하였다. 조정은 갑작스런 변란에 황망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도성 안은 흉흉해 성을 빠져나가는 자들로 줄을 이었다.


다음 14일 개성유수의 치계(馳啓)로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사(副使)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張紳)으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직시켜 강화를 수비하도록 하였다.

 

 

[남한산성 수어장대에서 바라본 영춘정 / 사진=문화재청 제공]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


인조도 그날 밤 남대문으로 서울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향했으나, 적정을 탐색하던 군졸이 달려와서 청국군이 벌써 영서역(迎曙驛: 지금의 서울 은평구 대조동과 불광동 사이)을 통과했으며, 마부태가 기병 수백을 거느리고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해, 한 부대를 보내 양천강(陽川江)을 차단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겼다고 보고하였다.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뒤 영의정 김류(金瑬) 등은 본 산성이 지리적으로 불리함을 들어 야음을 타서 강화도로 옮겨갈 것을 역설하므로 다음 15일 새벽에 인조는 산성을 떠나 강화도로 떠나려 하였으나 마침 눈이 내린 뒤라 산 언덕에 얼음이 얼어서 왕이 탄 말이 미끄러져 왕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갔는데, 여러 번 미끄러져 몸이 편안하지 못해 강화도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산성으로 돌아왔다.

 

삼전도의 치욕적 굴욕


강화도가 함락되어 왕자들과 비빈들을 포함한 200여명이 포로로 잡히자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7일동안의 항쟁을  끝내고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청군의 전리품으로 끌려가는 조선의 무고한 백성들, 청으로 끌려간 조선의 백성들은 청나라의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거나, 성의 노리갯감으로 삼으려는 뜻고 있지만 실상은 돈을 받고 조선에 되팔기 위한 목적이었다 / 사진= 영화 '최종병기 활' 영상 캡쳐]

 


청에게 항복을 한 조선을 청의 요구대로 신하의 예를 행하고 조공을 약속하였다. 또한 명나라와 교류를 단절하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병을 파병하기로 약조하였다.


마지막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삼학사를 비롯한 수많은 대신들의 청에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갔다.

 


잠실에 위치한 삼전도비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태종은 전승기념을 위해 비를 건립하였다. 정식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이지만 문화재 지정 당시 지명을 따서 삼전도비(사적 제101호)라고 지었다.


도성에서 송파에 이르는 한강나루였던 삼전도는 1950년대까지 나룻배가 다녔으나 70년대 이후 한상 개발로 인해 사라졌다.

 

이경석이 비문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다. 비석 앞면은 만주글자와 몽골글자로, 뒷면은 한자로 새겨 17세기 세 나라의 언어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삼전도비의 수난사를 살펴보면, 청일전쟁 이후 청의 세력이 약해지자 1895년(고종 32)에 강물 속으로 쓰러뜨렸으나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다시 세웠다가 1956년에 묻어 버렸다. 1963년 홍수로 모습이 드러나면서 다시 세웠다.


[놀이공월인 롯데월드가 당연히 연상되는 잠실의 석촌공원에 위치하고 있는 삼전도비 / 사진=문화유산국민신탁 촬영]

10년의 볼모 생활을 하다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조선 17대 효종)은 1645년(인조 23)에 환국하였으나, 세자는 2개월만에 죽었다. 그리고 인조의 뒤를 이른 봉림대군은 왕위에 오른 뒤 볼모 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재야의 인사를 발탁하고 군비를 확장하는 등 북벌의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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