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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국보 제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글쓴이 tntv 등록일 [2018.03.10]
이수는 용틀임이 실감나게 비틀려 새겨졌고, 앙화 위에 보주가 올려져있다. 중앙 네모진 부분은 두전(頭篆)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비석의 제목인 제액(題額)을 쓴다. 대부분 전서체로 쓰기에 전액(篆額)이라고 한다. 진감선사탑비는 '해동고진감선사비(海東故眞鑑禪師碑)'라고 쓰여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인 진감선사의 탑비이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몸돌에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 등 중앙에는 비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옆의 4면마다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직사각형의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는 등 많이 손상된 상태이다. 머릿돌에는 구슬을 두고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솟은 연꽃무늬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진성여왕 원년(887)에 세워진 것으로, 진감선사가 도를 닦던 옥천사를 ‘쌍계사’로 이름을 고친 후에 이 비를 세웠다 한다.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특히 붓의 자연스런 흐름을 살려 생동감 있게 표현한 글씨는 최치원의 명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할 만큼 뛰어나다.  -문화재청


하동 쌍계사(雙磎寺)

입춘(立春)이 지났다. 봄이 멀지 않았음인데, 아마도 곧 남쪽으로부터 꽃소식이 올라올테고  첫 소식은 매화(梅花)일 것이다. 그 매화를 보기위하여 해마다 3월초면 아직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섬진강 하류 전라도땅 광양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섬진강 건너편은 경상도 하동땅,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그 유명한 화개장터이다.

하동에서 화개장터까지 섬진강변을 따라 벚꽃길 80리라 통칭한다. 다시 화개장터에서 골짜기로 꺾어 들어가 화개천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있다. 천변 왼쪽은 오래된 십리벚꽃길로 남녀가 함께 걸어가면 혼인하게 된다는 일명 혼인길이며, 천변 오른쪽 더 늦게 생긴 도로변에도 심어놓은 벚꽃이 이미 무성해져 해마다 봄이면 이 화개천변을 따라 화려한 꽃대궐이 펼쳐진다. 바로 이 화개천변 십리벚꽃길이 끝날 즈음에 있는 절이 쌍계사(雙磎寺)로 국보 제47호 진감선사 탑비(眞鑑禪師塔碑)가 있는 곳이다.

쌍계사는 신라 진성왕 21년(722) 大悲(대비), 三法(삼법) 두 화상이 禪宗(선종)의 六祖(육조) 慧能(혜능)의 정상(頂相)을 모시고 귀국, '지리산 雪裏葛花處(눈 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 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지금 이곳에 절을 지었다. 그 뒤 당나라에 유학하던 진감선사가 귀국하여 퇴락한 삼법스님 절터에 玉泉寺(옥천사)라는 대가람을 중창하였고, 그 후 정강왕 때 쌍계사로 바뀌었으며,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버린 것을 벽암(碧巖)이 인조 10년(1632)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선 수행을 하는 선원(禪院),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는 강원(講院), 부처의 계율을 익히는 율원(律院)을 갖추어야 총림이라 부른다. 그동안 가야총림 해인사, 조계총림 송광사. 영축총림 통도사, 덕숭총림 수덕사. 고불총림 백양사를 일컬어 5대 총림이라 하였지만, 최근에 동화사, 쌍계사, 범어사를 추가하여 8대 총림으로 부르니 쌍계사로서는 경사스러운 일이다.

쌍계사 일주문. 피안(彼岸)으로 넘어가는 다리를 건너면 '삼신산 쌍계사(三神山 雙磎寺)' 라고 쓰인 일주문이다. 삼신산(三神山)은 중국에서 발해만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을 가리키는 말로 한국에서는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지리산을 일컫는 말이니 '지리산 쌍계사'쯤으로 읽으면 될 듯하다.

진감선사(眞鑑禪師) (774~850년)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 속성은 최(崔)씨. 전주(全州) 금마(金馬) 사람으로 부모를 일찍 여의고, 불법을 구하려는 뜻이 간절하여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 창주(滄州)에 가서 신감(神鑑)에게 출가하니, 얼굴이 검다하여 흑두타(黑頭陀)라 불렸다. 810년 숭산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앞서 당나라에 가 있던 도의(道義)를 만나 함께 다니다가 도의는 먼저 귀국하고 스님은 종남산에서 3년 동안 지관을 닦은 뒤에 길거리에서 짚신을 삼아 3년 동안 오가는 사람들에게 보시했다. 흥덕왕 5년(830) 귀국하여서는 상주 노악산의 장백사에 있다가 지리산으로 가서 화개곡의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창건한 옥천사(玉泉寺)를 크게 중창하였다.

진감선사 혜소는 불교음악인 범패를 들여와 대중화 시켜 많은 대중을 교화하였으며,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았다. 문성왕 12년(850), 나이 77세, 법랍 41년에 이곳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헌강왕이 시호 眞鑑禪師(진감선사) 탑호 大空靈塔(대공영탑)이라 하였다. 정강왕 때 옥천사를 쌍계사라 고치고, 최치원(崔致遠)으로 하여금 글을 지어 碑(비)를 세우니 국보 제47호 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이다.


진감선사탑비(眞鑑禪師塔碑). 국보 제47호

쌍계사의 전신 玉泉寺(옥천사)를 크게 중창한 진감선사를 기리는 탑비로 헌강왕이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탑호를 내렸다. 진성여왕 1년(887)에 세워졌는데 귀부와 비신, 이수가 모두 남아있다. 현재 대웅전 앞마당에 있으며, 비신의 훼손상태가 심각하여 외곽을 철제 틀로 덧붙여 보존하고 있고 글씨도 마멸이 심하나 다행히 영조 1년(1725)에 전문을 목판에 옮겨 새긴 것이 보존되고 있다 한다.

탑비의 비문은 고운 최치원이 짓고 쓴 명문장으로 총 2,417자의 해서체 글씨가 신품(神品)이라고 칭송받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로 우리나라 금석문의 으뜸으로 꼽힌다.
쌍계사 대웅전 앞에 동쪽을 바라보고 직각으로 서 있는 진감선사 탑비, 구도상 정확한 정중앙에서 약간 벗어나 보이며 세월이 흐르면서 지표면이 높아져서인지 비석은 표면 아래로 내려가 있는 모습이다.
귀부, 비신, 이수가 모두 온전하게 남아있지만 비신 앞면은 부분적으로 깨어져 부득이 비신의 측면과 후면에 철판 틀을 짜서 외곽을 감싸듯 둘러서 보호하고 있다.
이수는 용틀임이 실감나게 비틀려 새겨졌고, 앙화 위에 보주가 올려져있다. 중앙 네모진 부분은 두전(頭篆)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비석의 제목인 제액(題額)을 쓴다. 대부분 전서체로 쓰기에 전액(篆額)이라고 한다. 진감선사탑비는 '해동고진감선사비(海東故眞鑑禪師碑)'라고 쓰여 있다.
귀부는 다른 탑비에 비해 발도 작고 용머리도 실감이 덜하다. 아쉬운 부분이다.

진감선사(眞鑑禪師) 승탑. 보물 제380호


원래 탑비는 고승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며, 고승을 다비(화장)하여 모신 승탑과 함께 2종 세트로 남아 있어야 제격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탑비와 승탑이 멀리 떨어져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쌍계사의 진감선사 역시 탑비는 국보로 지정되어 대웅전 앞에 모셔져 있으나, 정작 승탑은 어디에 있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쌍계사 북쪽 능선 불일폭포 가는 길 중간에 서 있는 승탑 하나를 진감선사의 승탑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아쉽게도 관련 기록이나 명문이 없는 탓이다. 게다가 이 승탑은 몸돌이 제짝이 아닌 듯 아무 장식이나 조각 없이 다른 부분과 제대로 어울리지 않는다.
진감선사 승탑으로 추정되는 팔각원당형 승탑, 그냥 쌍계사 승탑이라고 부른다. 부도를 받치는 기단부는 상대석은 앙련으로, 하대석은 복련으로 중대석을 포함하여 장구형태를 이룬다. 그 위에 얹힌 몸돌이 아무 장식 없이 팔각모양이며, 지붕돌이 얹혀있는데 팔각모서리 귀꽃의 일부가 깨어졌다.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사산비명(四山碑銘)이란 '네 군데 山에 남긴 비석의 글'이라는 뜻으로, 신라말 최치원이 남긴 네 곳의 비명(碑銘)을 말한다.

통일신라 말기 대문장가 최치원(857~?)은 뛰어난 문장을 많이 남겼다. 그가 남긴 비문 중에서 `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聖住寺郎慧和尙白月光塔碑(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雙磎寺 眞鑑禪師大空塔碑(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大崇福寺碑(대숭복사비)`를 일컬어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칭하니, 국보 제47호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가 그중 하나이다.

'사산비명'은 최치원이 당대 고승의 행적이나 신라왕가의 능원(陵園)과 사찰에 관해 기록한 것이다. 사산비명은 그 시기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앞설 뿐 아니라 다른 전적에서 볼 수 없는 역사사실이 많아 한국학 연구의 필수적인 금석문이다. 4개의 비문 모두 사륙변려문(중국 육조 시대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유행한 한문 문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이 쉽지 않아 예로부터 많은 해설서가 나왔다.

우리 같은 일반인, 아마추어 답사가가 사산비명을 찾아보고 그 비문을 읽는다거나 뜻을 이해하고 역사적 가치를 단숨에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실제 어느 정도 해독력이 있다하여도 파손되어 남아 있지 않거나 부분적인 훼손이나 풍화 등으로 인한 손상으로 식별이 쉽지 않으니, 그 문장을 옮겨 적고 쉽게 풀어서 해석을 첨부한 설명문을 볼 수 있게 해준다면 참 좋을 것이다.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원문보기
http://senior.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19/201802190201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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