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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국보 제44호 장흥 보림사 남ㆍ북 삼층석탑 및 석등 (長興 寶林寺 南ㆍ北 三層石塔 및 ...
글쓴이 tntv 등록일 [2018.01.19]
왼쪽은 남탑 상륜부로 보륜이 3개이며 윗쪽 보개도 일부 손상되었다. 오른쪽 북탑은 보륜 5개와 보개가 온전하다.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보림사는 통일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체징(體澄)이 터를 잡아 헌안왕 4년(860)에 창건하였다. 그 뒤 계속 번창하여 20여 동의 부속 건물을 갖추었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다. 절 앞뜰에는 2기의 석탑과 1기의 석등이 나란히 놓여 있다. 남북으로 세워진 두 탑은 구조와 크기가 같으며, 2단으로 쌓은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기단은 위층이 큰 데 비해 아래층은 작으며, 위층 기단의 맨 윗돌은 매우 얇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쌓았으며, 각 층 몸돌에 모서리 기둥을 새겼는데, 2·3층은 희미하게 나타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계단형으로 5단씩이고, 처마는 기단의 맨 윗돌과 같이 얇고 평평하며, 네 귀퉁이는 심하게 들려있어 윗면의 경사가 급해 보인다.

대적광전 앞에 서 있는 삼층석탑 2기와 석등, 국보급 문화재의 위용이 느껴진다.

탑의 꼭대기에는 여러 개의 머리장식들을 차례대로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석등 역시 신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네모꼴의 바닥돌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8각의 아래받침돌을 얹고, 그 위에 가늘고 긴 기둥을 세운 후, 다시 윗받침돌을 얹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받쳐주도록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창을 뚫어 놓았고, 그 위로 넓은 지붕돌을 얹었는데 각 모서리 끝부분에 꽃장식을 하였다.

석등의 지붕 위에는 여러 장식이 놓여 있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모두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예가 드물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탑 속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석탑은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석탑과 더불어 석등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재청


가지산문(迦智山門)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

전남 장흥 유치면 가지산 아래 평탄한 지형에 자리 잡고 있는 보림사는 구산선문의 효시가 되는 가지산문 도량이며 한국 선불교의 종찰(宗刹)로서 자부심과 자존심을 가진 절집이다.

왼쪽은 남탑 상륜부로 보륜이 3개이며 윗쪽 보개도 일부 손상되었다. 오른쪽 북탑은 보륜 5개와 보개가 온전하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로 창건 이래 끊임없는 중창과 중수를 거쳐 6·25전쟁 때 소실되기 전까지는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찰이었으나 공비들이 퇴각하면서 불을 질러 국보 204호였던 2층 법당 대웅전 등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리고, 단지 천왕문(天王門)과 사천왕(四天王)·외호문(外護門)만 남았다. 그래도 국보인 삼층석탑, 석등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인 보조선사의 승탑과 탑비, 동부도, 서부도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역사 속 무게를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준다.

구산선문(九山禪門)

선종(禪宗) 불교는 삼국시대에 들어와 왕조들로부터 공인되고 왕실로부터 귀족, 서민들의 신앙으로 그 범위를 넓혀가던 중 중국에 유학하여 선(禪)을 배운 다수의 유학승들이 일시에 귀국하면서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신라후기에 이르러 불안했던 국내정세 탓으로 급속히 전파되고 지방호족들의 후원을 받다가 고려에 들어와서는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보다 안정되고 지방세력과 왕족을 연결, 사회적 통합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이후 명망 있는 선사들이 배출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유력한 산문들이 생겨나니 후대에 이를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부르게 된다.

구산선문은 실상산문(실상사), 가지산문(보림사), 희양산문(봉암사), 동리산문(대안사), 봉림산문(봉림사), 성주산문(성주사), 사굴산문(굴산사), 사자산문(흥령선원), 수미산문(광조사) 등인데 이들은 선(禪) 사상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한 종파였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 들어와 구산선문은 조계종(曹溪宗)이라는 선종으로 자연스럽게 결집되었으며 이후 선종과 교종의 통합운동과 단일 종단으로의 결집과정을 거쳐 오늘날 조계종(曹溪宗)이라는 선종으로 자연스레 이어져 왔다.

탑신 3층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이며, 층마다 우주(모서리 기둥)를 새겼는데 2, 3층은 다소 희미하다.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5단으로 크고 뚜렷하며 지붕의 네 귀퉁이가 바짝 들려져 반전이 큰 모습이다.

한국 선종의 법맥

도의국사는 우리나라에 선법을 최초로 들여온 선종의 종조(宗祖)로 추앙을 받는다. 선덕왕 원년(784)에 사신 김양공을 따라 당나라로 건너가서 37년간 치열한 수행을 하였는데, 이때 중국은 달마대사 이후 선종의 5조 홍인(弘忍)대사 문하가 북종선의 신수대사와 남종선의 혜능(후에 6조로 인가 받음)대사로 나뉘어 활동하던 시기였다. 도의국사는 육조대사의 법통을 이어 인가를 받고 도의라는 이름도 얻어 신라로 귀국하였지만, 당시 교종이 우세하던 상황에서 선종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양양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들어가 40년 동안 선정을 닦으며 염거화상에게 법을 전하고 열반에 든다.
 
도의선사의 법통을 이어받은 염거화상은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주석하며 선정을 닦았지만 선문을 개설하지는 못했다. 그의 제자 중에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나타나 도의선사처럼 중국으로 건너가 선종의 인가를 받고자 하였으나 중국 여기저기를 다녀도 고국의 도의선사 법지식과 다를 바 없다는 깨달음으로 3년 만에 귀국한다. 이후 20여 년간 염거화상의 억성사와 진전사, 태안 일대 등을 다니다 청양 장곡사를 개창하였다. 신라 헌안왕대에 이르러 장흥 지역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헌안왕은 체징을 왕사로 초빙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100여 년 전 원표대덕이 세운 가지산사로 옮길 것을 청하니 마침내 보조선사 체징이 가지산사로 이주하였다.

석탑의 앞에는 큼직한 배례석이 하나씩 놓여 있는데 안상 무늬를 조각하여 아름답다. 석탑은 흙바닥에 지대석을 깔고 그 위에 2층 기단을 놓았는데 1층기단은 높이가 낮은데 비하여 2층기단은 매우 크고 우람하여 튼튼해 보인다. 1층 기단에는 좌우로 우주(모서리 기둥)를 새겼고 탱주(가운데 기둥)는 2개를 새겼으며, 2층 기단에는 좌우로 우주(모서리 기둥)는 같으나 탱주(가운데 기둥)는 1개만 새겼다.

국왕은 왕명으로 장생표주를 세워 사찰구역을 확정해주고 금과 곡식 등 시주를 부어주었다. 수행제자와 신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보조선사 체징의 주석으로 대찰(大刹)로 변신하게 되고, 이것이 바로 구산선문의 효시가 되는 가지산문의 개창이다.
 
즉, 가지산문은 우리나라 선종의 효시이며 도의국사를 초조로, 염거화상을 2조, 보조선사를 3조로 하여 개산 되었다. 헌강왕 6년(880)에 보조선사가 세수 77세, 승랍 52세로 열반에 들자 3년 뒤에 헌강왕은 시호를 보조선사(普照禪師), 탑호를 창성탑(彰聖塔), 절 이름을 보림사로 내려주며 이곳이 선종의 총본산임을 인정한 것이다.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3보림이라 일컫는다. 

보림사 남ㆍ북 삼층석탑 및 석등

보림사는 고흥군 깊숙한 산속이기는 하지만 평지에 지어진 절집이다. 최근 초입에 거대한 산문(山門)을 세워 일주문이라 부르는데, 예전에 출입문처럼 일주문 역할을 하던 외호문(外護門)을 지나면 일직선상에서 조금 비켜난 각도로 사천왕상과 인왕상에 모셔진 사천문이 있다. 그 뒤편으로 너른마당에 철조비로자나불이 모셔진 대적광전이 있고, 그 대적광전 앞마당에 일금당(一金堂)쌍탑(雙塔) 형식으로 두 개의 석탑이 세워져 있으니 바로 국보 제44호 보림사 남ㆍ북 삼층석탑으로 두 개의 석탑 사이에 석등 한 기가 있으니 이를 포함한 3기를 묶어서 국보로 지정하였다.

높이 3.12m의 석등, 아래받침돌(하대석)이 두 겹으로 높아서 중간받침대(간주석)이 짧은 편이다. 그래도 화창위로 지붕과 상륜부를 치장하다보니 전체적으로 높아 보인다. 완전하게 보존된 석등으로 손꼽힌다.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하고 다가갔다. 대적광전이 동향(東向)인지라 쌍탑은 바라볼 때 오른쪽을 북탑, 왼쪽을 남탑이라 부른다. 북탑이 5.9m, 남탑이 5.4m로 높이가 비슷하며 생김새는 똑같다. 받침돌 위에 2층 기단과 3층 몸돌을 얹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으로 상륜부에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가 그대로 남아있다. 북탑은 보륜이 5개인데 반하여 남탑은 3개로 2개가 없어졌다.

비록 그 위쪽으로 수연과 용차, 보주 등은 안보이지만 이 정도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석탑이 별로 없으니 매우 귀한 것이다. 원래 상륜부 장식들은 쇠로 된 찰주에 끼워서 세우는데 쇠가 삭아서 없어지면서 소재들이 흩어져버리니 남아있기 어렵다. 반면 이곳은 찰주가 쇠가 아니라 돌로 되었기에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이라 한다.

이 탑은 1932년에 도굴꾼들이 사리장치를 훔치려고 넘어뜨렸던 것을 그다음 해에 복원했다. 이때 1층 탑신부 사리구멍에서 사리와 함께 조성내용이 기록된 탑지(塔誌)가 나왔는데, 신라 경문왕 10년(870)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이렇게 건립연대가 확실히 기록된 석탑은 거의 없어서 보림사 삼층석탑은 우리나라 석탑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다.

대찰(大刹)의 위용을 자랑하려는 듯 세운 산문(山門)이 웅장하다.

석등 역시 전형적인 신라 석등으로, 네모꼴의 바닥돌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8각의 아래받침돌을 얹고, 그 위에 가늘고 긴 기둥을 세운 후, 다시 위받침돌을 얹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받쳤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창을 뚫어 놓았고, 그 위로 넓은 지붕돌을 얹었는데 각 모서리 끝부분에 꽃장식을 하였다. 석등의 지붕 위에는 보개와 보주 등 여러 장식들이 얹혀 있다.

보림사는 장흥읍에서 탐진강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거대한 장흥댐 수면 옆으로 돌아 들어가는데 풍광이 수려하고 조용한 곳이다. 가지산(510m) 아래 평지에 자리 잡고 있으나 도로와 절집 사이 앞마당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아 어수선해 보이고 차량이나 사람의 진출입이 구분이 없다. 사하촌(寺下村)도 없고 절 앞에 그 흔한 식당 하나 기념품점 하나 없다. 입장료도 없고, 주차를 여기 해라 저기 해라 따지는 사람도 없는데 다행히 최근에는 문화유산 해설사가 고정 배치되어 상세한 설명을 청하여 들을 수 있다. 그런 절집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보니 절집 못미처 동구 밖쯤에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거대한 산문이 세워져 있고, '구산선문종찰 가지산 보림사'라고 어마어마한 현판을 걸었다. 자랑하고 싶어 세운 듯한데 과하다 싶었다. 유서 깊은 절집에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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