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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국보 제33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
글쓴이 tntv 등록일 [2017.11.03]
▲비석의 글씨를 식별하기 어렵고 내용의 이해가 쉽지 않아 비석 옆에 설명 판을 세워 놓았다.
▲비석의 글씨를 식별하기 어렵고 내용의 이해가 쉽지 않아 비석 옆에 설명 판을 세워 놓았다.

빛벌가야(지금의 창녕군)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시하면서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다. 당시 창녕군은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 마치 부챗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 신라에 병합되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군)와 합쳐져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化郡)으로 불리게 되었다.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 안에 모셔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나, 후반부는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다른 순수비의 내용을 참고할 때 대략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이념, 포부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반부에 당시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당시 지방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신라 진흥왕 22년(561)으로, 이 지역을 가야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왕의 정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또한 진흥왕 당시의 사실을 기록해 놓아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완해줌으로써,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청)


척경비(拓境碑)

북한산 비봉에 세워진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는 듣기에 비교적 익숙한데 척경비(拓境碑)라는 말은 왠지 낯설고 어렵게 들린다. 학교 다닐 때 암기식 입시 위주 교육의 산물, 신라 진흥왕 순수비 4개는 북한산비, 마운령비, 황초령비, 창녕비의 바로 그 창녕비인데 북한산비는 순수비인데 반하여 창녕비는 왜 척경비인가? (마운령비, 황초령비는 함경남도에 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일반적인 비석의 형태가 아니라 자연석 하나로 된 몸돌이 전부이며 보호각 안에 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일반적인 비석의 형태가 아니라 자연석 하나로 된 몸돌이 전부이며 보호각 안에 있다.

순수(巡狩)는 예전에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는 일을 이르던 말인데 북한산비에는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말이 있지만 창녕비에는 순수(巡狩)라는 말이 없이 새 점령지를 돌아본 것을 적었기에 국경을 넓혔다는 척경(拓境)이 맞는다는 것인데 일부 학자들은 북한산비나 창녕비나 모두 순수비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다는 주장이니 우리에겐 어렵기만 한 이야기다. 진흥왕 순수비 4개 중 2개는 북한에 있어 볼 수 없지만 창녕비는 이들보다는 단양 적성비(국보 제198호)와 비슷하다.


비석은 언제, 어떻게 세웠나?

진흥왕 때 다른 순수비들과 함께 세워졌으나 위치적으로 보아 먼저 영토에 편입되었을 것이므로 비석도 그만큼 먼저 세웠을 것이다. 즉, 삼국사기에 보면 진흥왕 16년(555년)에 비사벌(창녕의 옛 이름)을 병합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직후인 561년 진흥왕은 창녕을 직접 찾아 점령지 통치에 대한 정책들을 신하들과 함께 발표하니 이 사실을 새긴 것이 창녕비이다. 한반도에서는 가장 오랜 비석이다.

비석의 외형은 삼국시대 비석이 대개 그렇듯이 대석(臺石)이나 개석(蓋石)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암석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그마저 한쪽 편이 찌그러진 모습인데 이 비석은 원래 이곳이 아니라 화왕산록(火旺山麓)에 있었으며 소풍 나온 학생이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진 후 1924년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비석의 글씨를 식별하기 어렵고 내용의 이해가 쉽지 않아 비석 옆에 설명 판을 세워 놓았다.
▲비석의 글씨를 식별하기 어렵고 내용의 이해가 쉽지 않아 비석 옆에 설명 판을 세워 놓았다.

아쉽게도 글자는 전체적으로 27행 600자가 넘지만 그중 약 400자 정도를 판독할 수 있고, 그나마 육안으로는 대부분 식별이 어렵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알려진 비문의 내용은 다른 진흥왕 순수비와 같이 진흥왕이 이곳 점령지에 행차하여 국왕의 통치 정책과 이념을 당부한 내용, 그리고 함께 행차한 신하 42명의 속부(屬部), 인명(人名), 관직(官職), 직위(職位)를 모두 적어 놓았는데 삼국시대 신라 비문의 통상적인 기록방식으로 보인다
원문보기
http://senior.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2/28/201512280092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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