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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글쓴이 tntv 등록일 [2017.09.03]
▲분황사 보광전과 안에 모셔진 약사여래입상.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널찍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 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인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 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 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문화재청>


분황사(芬皇寺)

경주 시내 황룡사 터 옆, 구황동에 있다. 아마도 황룡사, 분황사 등 황(皇)자 들어가는 절이 9개 있었던 곳이 아닌가 싶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 간 절이다. 643년에 자장이 당나라에서 대장경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원효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였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는 원효의 소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좌전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 경덕왕 때 희명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가서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고 하며, 경덕왕 14년(755)에는 무게가 30만 6,700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양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역사가 오랜 분황사에는 허다한 유물이 있었을 터이나 몽골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고, 지금은 분황사에 둘러놓은 어른 키만 한 담장 위로 석탑의 윗부분만이 보이는 자그마한 절이 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석탑과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이라는 우물들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편에 쌓여 있다. 1965년 분황사 뒷담 북쪽으로 30여 미터 떨어진 우물 속에서 출토된 불상들이 경주박물관 뜰에 늘어서 있다. <분황사 종무소>


모전석탑(模塼石塔) - 국보 제30호

분황사 탑은 벽돌로 쌓은 전탑(塼塔)을 흉내 내어 돌을 벽돌처럼 잘라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높이 9.3m로 현재는 3층만 남아있는데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대단히 크고 멋진 탑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파손된 것을 보수하려다 실패하고 일제 강점기 때인 1915년에 수리하여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분황사 모전석탑,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국보 자격이 충분하다.
▲위 분황사 소개에서 어른 키만 한 담장 위로 석탑의 윗부분이 보인다는 구절대로 사진을 찍어보았다. 밖에서 본 모습이다.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 보면 문득 상공에서 내려다보고 싶을 때가 많다. 드론을 갖고 다녀야 하나? 생각해보기도 하는데 마침 분황사 입장권에 위에서 내려다본 분황사 모전석탑 모습이 있었다. 역시 건축학적으로도 미끈하게 잘 생겼다.

1층 네 면에 커다란 감실을 만들어 놓았으며 입구 양쪽에는 인왕상을 세웠는데 힘찬 느낌의 모습이다. 네 귀퉁이에는 돌사자를 깎아 세웠으며, 2층과 3층은 1층에 비하여 매우 낮고 3층 윗부분은 상륜부 없이 중앙을 높게 하여 모둠 지붕 형태로 마감하였다. 1915년 해체, 수리할 때 2층과 3층 사이에서 석함 속에 장치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으며 이때 발견된 병 모양의 그릇, 은합, 실패와 바늘, 침통, 금은제 가위 등은 경주박물관에 있다.


돌사자 상

큰 돌을 쌓아올린 기단은 충분히 크고 넓어서 탑이 들어선 자리 밖으로도 꽤 여유롭게 넉넉하며 기단의 네 귀퉁이에는 돌사자를 깎아 세웠는데 2마리는 수놈, 2마리는 암놈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사자 상을 잘못 이해하여 바닷가 쪽에 있는 것은 물개라거나 애매하니까 그저 석수(石獸)라고 하며 넘어가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 옛날 사자를 못 본 채 조각을 해야 했던 선조들의 애로사항 때문이며 특히 암사자를 사자가 아닌 물개로 보이게 한 건 아닌가 싶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사자 네 마리, 각각 방위대로 배치하였다. 마지막 사진을 물개로 보는 듯하지만 암사자이다.

불교에서의 사자 조각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분황사 모전석탑처럼 네 곳에 사자를 배치한 것은 불국사 다보탑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인도에서는 모두 수사자만 조각을 했으나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로 넘어오면서 암수가 함께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분황사탑 사자 네 마리나 다보탑 사자 네 마리는 모두 암수 각 2마리씩으로 보아야 맞는다. 심지어 세조의 암살을 모면케 했다는 상원사의 고양이 석상도 사실은 돌사자 암수 2마리라고 하니 다시 한 번 정리해야 할 듯하다.


감실과 인왕상

분황사 모전석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황룡사 구층탑 같은 목탑을 보고 세운 듯하다. 그래서인지 원래 9층이었다고 하나 3층만 남은 지금의 모습을 보아도 건축물 같은 느낌이 강하다. 벽돌처럼 쌓아 더욱 그렇다. 특히 탑의 1층은 2, 3층에 비하여 월등하게 크고 높아서 사방 네 면의 면마다 감실을 큼직하게 파고 돌문을 달았는데 좌우 두 짝의 쌍문으로 문고리를 달았던 흔적도 보인다.

문지방석과 위쪽 인방석을 버티는 좌우 문설주 역할을 하는 돌을 큼직하게 박아 넣은 후 그곳에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상을 돋을새김으로 새겼는데 모두 반라의 모습으로 힘찬 느낌을 준다. 일부가 파손되어 아쉽다. 그런데 위 감실은 애초부터 출입하는 목적이 아니었는지, 나중에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높직한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현재는 네 방향 아무 곳에도 안 보인다. 그 대신 감실 앞에 장방형의 돌을 얹어놓고 다시 갖가지 공양물을 늘어놓았는데 눈에 거슬린다.

▲1층의 각 면에는 감실을 큼직하게 만들었고 그 좌우로는 인왕상을 세웠다. 2개의 돌문은 절반쯤 열린 채로 그 안이 보인다.
▲감실에는 잘 알아보기는 어려우나 부처님을 모신 듯한데, 이 탑을 만들 때부터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 밖에도 분황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보광전이 있고, 그 안에는 약사여래입상이 모셔져 있는데 영조 때 세워진 것이다. 또한, 신라 때 3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우물이 지금도 있는데 당나라 사신이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 가서 빼앗아 왔다는 삼룡변어정(三龍變漁井)이 모전석탑 앞에 남아 있지만, 안으로 뚜껑을 덮고 잠가놓아서 물을 마실 수는 없다.

그리고 우물 옆에는 비석은 없이 대좌만 하나 남아있는데, 고려 숙종이 원효의 공덕을 기려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웠지만, 비석은 없어지고 대좌만 남아 근처를 굴러다니다가 추사 김정희가 대좌에 새겨진 글씨를 해독하고는 이를 찾았다고 한다.

▲분황사 보광전과 안에 모셔진 약사여래입상.
▲용 3마리가 살았다는 우물, 삼룡변어정(三龍變漁井).
▲원효대사의 비석 대좌, 옆 부분에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은 김정희가 새겼다는데 잘 안 보인다.

답사를 다니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이런 국보급 문화재가 대부분 불교 문화재이다 보니 거의 절집 마당이나 소유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 특히 이처럼 석탑이나 석등 같은 경우에는 절집에서 이런저런 공양물을 앞뒤 좌우로 늘어놓거나 하늘에는 주렁주렁 등을 달아놓는 바람에 외관상 보기에도 안 좋고 사진 한 장 말끔히 찍기 어렵다. 실내는 사진촬영금지에 실외는 이것저것 걸린 것들이 너무 많다.

그것도 초파일을 전후해서 정성껏 매단 연등은 예쁘기나 하지, 일 년 내 철거하지 않아서 낙엽 지고 찬바람 부는 겨울철에도 마구 찢어진 모습의 등들이 여전히 매달려 있는 경우에는 눈살이 찌푸려진다. 해당 절집에서 조금 더 신경을 쓰면 좋겠다. 가능하면 문화재에 직접 등을 매다는 일은 삼가기 바란다.

 

출처:조선일보

http://senior.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7/13/20150713022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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