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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문화유산 답사기]의성·안동·상주에서 만나는 돌탑의 세계
글쓴이 문화재방송.한국 등록일 [2020.12.13]

 

 

[문화유산 답사기]의성·안동·상주에서 만나는 돌탑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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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둥근 그릇을 엎어 놓은듯한 인도의 복발형 탑은 불교 발생 이전부터 고대 인도에서 무덤으로 쓰였다. 이후 불교의 확산과 더불어 석가모니의 유골과 사리를 봉안하면서 불교 신앙의 대상물이 되고, 대승불교가 크게 일면서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믿음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 위한 신앙의례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탑이 곧 신앙의 대상이었다.
탑의 모양이나 재료는 시대와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게 된다. 중국은 벽돌을 구울 수 있는 진흙이 많았기 때문에 전탑(塼塔)이 주류를 이루고, 화산 열도에 속하는 일본은 화산암의 재질상 전탑이나 석탑 제작이 어려워 자연 목탑이 많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불탑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목탑이 중심이었지만, 안동·의성을 중심으로 일부에서는 전탑도 만들어졌다. 중국의 전탑과 일본의 목탑에 견줘 우리나라가 석탑을 중심으로 삼은 까닭은 질 좋은 화강암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석탑은 목탑이나 전탑보다 장점이 많다. 석탑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버틸 수 있지만 목탑은 내구성이 짧았다. 전탑이 갖는 표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고 구조적 안정성이 높다는 장점도 있다. 탑이 지닌 여러 의미를 곱씹으면 돌탑 여행의 즐거움이 더욱 깊어지겠다.

 

 


- 탑리리 오층석탑과 조탑리 오층전탑
동네 이름마저 탑리 아니던가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국보 제77호)은 무심히 스쳐지나갈 수 있는 곳에 보석처럼 서 있다. 조그만 마을에 서 있는 이 탑이 국보란다. 동네 이름도 탑리다. 마을 전체가 탑을 받치는 기단 같은느낌이 든다. 중학교 교정 한켠에 들어선 이 오층석탑은 야트막한 1단 기단 위에 탑신을 5층으로 올렸다. 얼핏 보면 벽돌로 만든 전탑인 듯 여겨진다.

기단의 기둥돌과 탑신을 모두 별개의 돌로 짜 맞추고, 몸돌의 기둥돌들도 배흘림까지 다듬은 모습에서 백제탑 양식이 엿보인다. 지붕돌의 층급받침과 지붕이 모두 단을 이루고 있는 모양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을 닮았다. 백제 석탑과 신라 전탑이 혼합된 양식이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제30호)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 석탑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 작품이다.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보물 제57호)은 화강암과 벽돌을 섞어 만든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이다. 우리나라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이 주류다. 그런데 안동과 의성에 전탑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의 한 종파가 이곳에 전탑을 집중해서 유행시켰을 것이다, 벽돌 말고 다른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조건 때문이다, 풍수지리설에따라 특정 시기에 벽돌로 만드는 전탑이 집중해서 축조되었을 것이다, 백제 쪽에서 장인들을 초청해 발달된 기술자들의 솜씨로 전탑이 축조되었을 것이라는 등 여러 견해가 나와 있다.
우리나라 전탑은 대부분 화강암을 함께 쓰고 있다. 돌로 된 1층 몸돌 남면에는 감실을 파고 좌우에 인왕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2층 이상 탑신에서 2층과 4층 몸돌 남면에 형식적인 감실이 있고, 지붕돌에는 안동의 다른전탑들과는 달리 기와가 없다. 1층 지붕부터는 벽돌로 쌓았는데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벽돌에는 문양이 남아 있다. 1층 몸돌의 높이가 지나치게 높고 5층 몸돌이 너무 커서 부조화스러운 까닭은 보수를 거치면서 원형이 많이 손상됐기 때문이겠다. 감실을 지키는 인왕상의 퉁방울 눈이 웃음을 짓게 한다.

 

 


-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안동 운흥동 오층전탑
벽돌로 만든 전탑의 묘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국보 제16호)은 통일신라시대 절간인 법흥사에 있던 탑으로 짐작되지만 둘레에 민가와 철도가 들어서 있어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1층 기단에 7층탑신을 안정되게 쌓아 올렸다. 이칠층전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데, 이는 전탑 일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탑이 숭배의 대상이므로 아무래도 커다랗게 쌓아야 더욱 위엄이 있다고 여긴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전탑은 사람들에게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몸돌의 각 층은 무늬가 없는 진한회색 벽돌을 쌓아 올렸다.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계단 모양으로 층단을 이루는 일반적인 전탑 양식과는 달리, 윗면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전탑이 목탑을 모방해 만들어졌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아울러 탑머리는 금동제 귀금속으로 장식돼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안동 운흥동 오층전탑(보물 제56호)은 옛 기록인 <동국여지승람>과 <영가지(永嘉誌)>에 7층 전탑으로 기록되어 있다. 1608년 편찬된 안동 읍지인 <영가지>에 따르면, 운흥동 오층전탑은 원래는 7층이었고 탑머리 장식이 금동제였는데 ,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인들이 훔쳐가면서 무너져 선조 31년(1598 )에 5층으로 새로 쌓았다. 당시 이곳에 법림사(法林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절터가 안동역으로 들어가 버렸다. 당간지주도 나란히 있다.
이 두 탑은 그러므로 공통점이 많다. 둘 다 벽돌로 만든 전탑이고 7층이며 머리 장식이 금동제였다.

-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그 유명한 '제비원 미륵불'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보물 제115호), 이른바 '제비원 미륵불' 앞에는 늘 사람들이 붐빈다.
기도 효험이 크다는 소문 때문이다. 제비원이 있는 곳은 전국에서도 땅의 기운이 센 자리다. 사람 손이 닿을 만한 데는 동전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바위가 거의 수직에 가까워서 동전이 달라붙어 있기 어려워 보이는 데도 그렇다.
높이가 12.38m나 되는 거대 불상으로, 높은 암벽에 몸통을 얕게 새기고 얼굴과 머리를 따로 조각하여 올려놓았는데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양식이라 한다. 머리와 얼굴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어서 원래는 채색돼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특히 입술은 붉음이 더 뚜렷하다. 일제강점기 초기만해도 부처 머리 위에 닫집이 있었다. 어깨 부분에 닫집을 위해 세운 기둥 자리가 남아 있다.
제비원 미륵불이라고도 불리는 연유는 이 자리에 옛날 원(院·관원들의 숙소와 교통 등 편의를 제공하던 곳)이 있었기 때문.
앞쪽에 연구사(燕口寺), 뒷쪽에 연미사(燕尾寺)가 있었고 제비가 앉아 있는 모습이라고도 했다.
언덕에 있는 연미사중수비(燕尾寺重修碑)가 이를 뒷받침한다. 조선 말기까지도 제비원을 중심으로 술집과 여각이 즐비했다. 제비원이 안동으로 오는 손님들이 머물던 곳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서로 이해된다.
앞에 떨어져 있는 바위는 이름이 '울바위'다. 뒤에 있는 바위에만 부처를 새기니 앞에 있는 바위도 새겨 달라고 울었다는 얘기다. 울바위에는 부처 대신 '나무아미타불' 글자를 새겼다. 뒤쪽 언덕배기에는 삼층석탑(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99호)도 있다.

 


- 상주 남장사 석장승
토속 향취 물씬한 마을 수호신

 

상주 남장사 석장승(경상북도민속문화재 제33호)도 '제비원 미륵불'처럼 토속 향취가 물씬 풍긴다. 자연석을 그대로 살려 다듬은 걸작. 성난 듯 위엄있는 표정을 나타내려 했는데도 소박함과 천진스러움이 느껴져 빙그레 웃음이 난다. 한쪽으로 치우친 비뚤어진 얼굴에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왕방울눈과 커다란 주먹코가 인상적이다. 가슴에는 한 가닥 수염이 있으며 밑에 '하원주장군(下元周將軍)'이라는 글귀를 새겨놓았다.
원래 남장동에 있었는데, 1968년 저수지 공사로 현재 자리로 옮겼다. 조성연대는 남장사 극락보전 현판의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순조 32년(1832년)으로 추정된다. 남장사에는 사천왕이 없으므로 사찰 입구에 세워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과 호법의 신장이기도 하다.

상주 복룡동 당간지주(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6호)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짐작되지만 길가 논 한가운데에 있어 원형을 알 수 없다. 커다란 절간 대웅전 앞마당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을 법하다. 당간지주는 사찰 들머리나 법당 앞에 마련해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당간지주의 크기로 절간의 규모까지도 짐작할 수 있다.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보물 제117호)은 사벌국 왕릉이라 전해지는 곳 바로 옆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암 석탑이다. 석탑은 전탑보다 크기는 작으나 단단하고 야무진 느낌을 주는 면에서는 전탑을 앞선다. 1층 기단에서 하층 기단면석을 두지 않는 양식은 상주·문경에 있는 탑들의 특징이라고 한다. 비례가 잘 맞지 않고 기단 일부가 망가져 이상한 모습이 됐다. 어리숙한 몸돌에 기대어 앉아 있는 머리 없는 석조여래좌상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상주박물관 석각천인상(보물 제661호)은 주악(奏樂)천인상과 공양(供養)천인상을 새겼다. 원래석탑 기단석이나 면석으로 쓰였으리라 짐작된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이며, 수작이다. 주악상은 비파를 타는 모습으로, 화관을 쓴 머리는 앞으로 숙이고 한 발을 앞으로 내밀어 자세가 부드럽다. 자태는 웃음을 살짝 머금어 단아한 표정이며, 비파를 타는 두 손은 섬세하다. 공양상은 오른손으로 연꽃봉오리를 받쳐들고 있는데 마치 움직이는 듯 자연스럽다. 만든 시기는 8세기로 여겨지는데, 당시 복식(服飾)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 상주 증촌리 석조여래좌상과 석조여래입상
고려시대 불상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작품

 

상주 용화사에 있는 증촌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20호)은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왼손에 약함으로 보이는 지물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불로 짐작된다. 광배(光背)는 없으며, 대좌는 8세기에 많이 나타나는 팔각형으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안정감이 느껴진다. 수평으로 길게 뜬 눈, 웃음기 없는 작은 입, 군살 붙은 턱 같은 세부 표현은 고려시대 불상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작품임을 알려준다.
통일신라 중기의 풍만하고 균형 있는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형식화·경직화돼가는 특색을 보여주는 통일신라 후기 작품이다. 얼굴과 몸은 시멘트로 이어져 조잡한 느낌이 든다.

 

상주 증촌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118호)도 같은 절간에 석조여래좌상과 함께 모셔져 있다. 광배와 불상이 한 돌로 조각돼 있는데 많이 닳고 훼손됐다. 좌상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경직된 느낌이다.
상주 상오리 칠층석탑(보물 제683호)은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경술국치를 겪어 일본 헌병이 탑신을 허물어버렸는데 1978년 복원했다.
2층 기단 위에 탑신을 7층으로 올렸다. 얇아보이는 지붕돌은 느린 경사가 흐르고, 네 귀퉁이에서는 치켜올림이 뚜렷하며, 밑면 받침은 5층까지는 5단을, 6·7층은 4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는 화반만이 남았다.
날렵함과 경쾌함이 돋보이는 탑으로, 전체적인 균형미와 정제미가 뛰어나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죽어서 제비가 되어 날아간 목수, 안동 제비원에 얽힌 이야기들

 

제비원은 성주풀이에 나오는 성주의 본향이다. 성주는 집을 짓고 지키는 수호신으로 식구들 건강과 화목을 돌보고 집을 재해로부터 보호해 주기도 한다. 집은 단순히 개별 가정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씨족공동체나 지역공동체로 범주가 넓어진다. 성주신앙은 우리 문화 여러 뿌리 가운데 하나다. 성주신은 처음으로 집 짓는 방법을 스스로 깨우쳐 그것을 여러 사람에게 가르쳐준 '목수의 신'이다. 또 아내의 얘기를 귀담아듣고 아내를 소중하게 여기며 집안을 화목하게 만드는 가장의 신이다. 성주는 나아가 솔씨, 소나무이기도 하다. 성주의 본향이 안동 제비원인 까닭도 제비원 솔씨에 근거가 있다. 그렇게 읊는 전설이나 민요가 많다.
이를 반영하듯, <영가지(永嘉誌)>에서 "아득하게 높다란 지붕 추녀가 반공에 나래를 편 듯하다"고 표현한 제비원 누각을 지은 목수가 죽어서 제비가 되어 날아갔다는 전설도 있다.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진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을 비롯한 목조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는 까닭도 이 때문이란다.
성주풀이는 두 가지다. 하나는 무당이 부르는 무가이고, 다른 하나는 보통 지신밟기에서 부르는 노래다. 내용은 비슷하다. 성주의 본향이 안동 제비원임을 밝힌 다음 제비원에서 솔씨가 날아들어 커다란 소나무로 자랐고, 이를 갖고 집을 지었으니 매우 번창하리라는 줄거리다. 제주도에서 함경도까지 성주풀이를 할 때면 한결같이 이렇게 노래한다.
제비원에는 전설이 있다. 주인공 이름은 제비를 떠올리게 하는 연이 처녀다. 행실이 착하고 예쁜 연이는 여덟 살에 부모를 여의고 제비원에서 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힘들게 일하면서도 글도 익히고 미륵불에 늘 정성으로 기도했다. 이런 연이를 이웃 마을 부잣집 총각이 좋아하게 됐는데 그만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총각은 염라대왕에게 사정해 연이의 공덕을 빌려쓰고 되살아나면 재물로 연이한테 갚기로 했다.
갑자기 엄청난 재물이 생긴 연이는 부처에게 시주해 제비원 누각 공사에 쓰기로 했다. 5년에 걸쳐 지어진 법당은 제비가 날아가는 모양 같았다. 완공하던 날 기와를 얹던 와공이 높다란 지붕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영혼은 제비가 되어 날아올랐다. 연이도 착하게 살다가 서른 여덟에 세상을 떠났는데 영혼은 제비원에 깃들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절간을 연비사(燕飛寺) 또는 연미사(燕尾寺)라 하고, 연이가 살던 곳을 제비원이라 하게됐다 한다. 역사가 오랜 제비원에 있을 법한 얘기이다.

 

 

 

 

*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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