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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 의열단·조선의용대 이끈 독립투쟁의 거두 김원봉
글쓴이 tntv 등록일 [2019.02.21]
 
▎‘마지막 분대장’ 김학철의 회고에 따르면 난징 시절 민족혁명당 청년당원들은 묘오율원 경내의 누관(樓觀)이라는 건물에 기거했다. 후자화위안 북측 담장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만나는 구와관시(古瓦官寺)라는 절이 바로 그곳이다.

[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

의열단·조선의용대 이끈 독립투쟁의 거두 김원봉 

질곡의 역사에서 ‘삭제된 영웅’ 

·사진 윤태옥 다큐멘터리 제작자, 작가
 
의열투쟁을 시작으로 28년간 독립운동에 큰 족적 남겨…냉철한 판단력과 넓은 이념적 스펙트럼은 오늘날에도 가르침 주는 유용한 리더십

최근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의열투쟁을 그린 두 편의 영화 <암살>과 <밀정>이 개봉돼 인기리에 상영됐다. 이 두 영화에 모두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1920년대에는 의열단을 조직해 항일 의열투쟁에 나선 것을 시작으로 28년간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독립군의 거두. 식민지 백성의 희망이자 일경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으나 해방 후 남과 북 모두에서 삭제된 채 비극적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위대한 독립투사. 김원봉의 흔적을 따라간다.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곳은 우한의 후베이(湖北)성 총공회 자리로 추정한다. 우리가 검색을 통해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 단체사진이 바로 이곳에서 촬영한 것이다. 조선의용대 다섯 글자의 자모를 풀어쓴 군기가 이색적이다.
조국이 망하자 그는 스물한 살의 나이에 조국을 떠나 중국대륙을 떠돌며 28년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내내 첫 손꼽히는 독립운동 지도자였다. 1920년대 그가 조직한 의열단은 항일 의열투쟁에 앞장섰다. 식민지 백성에게는 희망이었고, 일경에게는 공포였다. 1930년대에는 군정학교를 세워 육사 이원록을 비롯한 수많은 젊은이를 독립전선의 운동가로 키웠다. 의열단을 업그레이드해 민족혁명당을 만들고, 이를 다시 조선민족전선연맹으로 확대했으며, 그 아래 조선의용대라는 정규군을 창설했다.

나중에 조선의용대의 본부는 임시정부 광복군의 주축이 되었고, 주력은 타이항산(太行山)으로 들어가 조선의용군이 되었다. 1940년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이 일제의 토벌을 견디지 못하고 소련으로 피신한 이후에도 조선의용군은 일본군과 혈투를 벌였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돼 치욕을 당하고는 3일간이나 통곡해야 했다. 이후로도 끊임없는 테러의 위협 속에 결국 그는 월북했다. 네 동생은 1950년 보도연맹사건으로 모두 총살당했다. 집안은 풍비박산했고, 그의 연로한 부친은 굶어 죽었다. 자신도 1958년 김일성에게 숙청당하고 말았다. 남과 북 모두에서 삭제된 채 비극적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위대한 독립투사, 바로 김원봉이다. 온전한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질곡의 우리 현대사다.

그럼에도 그의 업적은 증발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골방에서 힘들게 그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겼고, 누군가는 주목받지 못하던 그를 주제로 학술연구를 했다. 그런 세월이 쌓이다 누군가 영화 속에 그를 ‘특별출연’시켰다. <암살>과 <밀정>이라는 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영화는 김원봉이라는 존재를 망각에서 꺼내 대중의 가슴에 큰 이름으로 새겼다.


▎1918년 9월 김원봉은 앞으로 영어권 국가가 세계정세를 주도할 것으로 생각하고 난징의 진링(金陵)대학으로 가서 영어를 공부했다. 지금의 난징대학 구내에 있는 진링대학 구지.
영화가 상영될 즈음 김원봉의 흔적을 찾아 네 번째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출국의 피로감에 잠시 눈을 감고 있노라면 비행기는 금세 서해를 가로질러 만주의 하늘로 들어선다. 이따금 흔들리는 비행기에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답사여행을 시작하기 이전에 알고 있던 독립운동의 역사를 반추해봤다. 참으로 빈약했지만 기억에 새로운 장면도 여럿이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 윤봉길의 훙커우(虹口)공원 의거에 부산경찰서 폭파, 밀양경찰서 폭파, 조선총독부 폭파,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암살 시도,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베이징에서의 일본 밀정 김달하 처단 등이 떠올랐다. 거사를 위해 폭탄을 국내로 들여오다 실패한 사례도 있었다. 1920년 밀양으로 폭탄을 반입한 사건과 1923년의 반입사건이 그런 사례다.

이런 사례들을 ‘의열’ 또는 ‘폭렬’투쟁이라고 한다. 적의 요인을 암살하거나 주요 시설을 폭파하는 것이다. 군대끼리 전투를 벌이는 전쟁과도 다르고, 3·1운동이나 6·10만세시위, 노동쟁의, 소작쟁의 등의 대중운동과도 구별되는 투쟁방식이다.

그런데 이들 폭렬투쟁 가운데 안중근·윤봉길 두 의사의 거사를 제외하면 모두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이 1920년대에 일으킨 사건이다. 1923년 1월 12일 종로서 폭탄투척사건은 의열단 김상옥이 주인공이다. 김상옥은 폭탄을 투척한 뒤 귀신같이 도주했고, 일제는 경찰을 총동원해 추격했다. 김상옥은 열흘 동안이나 서울 시내를 휘저으면서 10여 명의 일경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혔다. 마지막 남은 총알로 자살했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한 영화 같은 사건이다. 영화 <밀정>은 시작하자마자 총성과 폭음 속에 피를 튀기는 추격신으로 관객을 숨도 못 쉬게 휘어잡는다. 장렬하게 스스로 최후를 맞이하는 그가 바로 의열단원 김상옥이다.

약관의 나이에 의열단 조직하고 단장으로


▎김원봉이 1919년 11월 9일 동지들과 모여 의열단을 창설한 지린(吉林)성 지린시 광화루(光华路) 57호 파호문 밖 중국인 판(潘)씨 집터. 지금은 중국농업은행 건물이 들어서 있다.
1923년의 폭탄반입사건은 경기도경찰부의 경부였던 조선인 황옥과 연계된 사건이다. <밀정>은 바로 이 사건을 기실(紀實)로 한 영화다. 영화에서는 경부 이정출이 의열단 비밀요원으로 묘사되지만, 역사에서는 황옥 경부가 어느 쪽에 섰는지 명확하지 않다.

조선총독부 폭파의 주인공은 김익상이다. 김익상은 1921년 9월 12일 전기수리공으로 위장해 총독부에 잠입했다. 그러나 비서실을 총독 집무실로 잘못 알고 폭탄을 터뜨리는 바람에 총독 폭살에 실패했다. 김익상은 혼란한 틈을 타 유유히 총독부에서 빠져 나와 베이징으로 복귀했다.

김익상은 오성륜·이종암과 함께 1922년 3월 28일 상하이 와이탄(外滩)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를 저격했다. 김익상은 현장에서 체포돼 20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출옥 얼마 후 집으로 찾아온 경찰과 함께 나가서는 행방불명됐다. 오성륜도 체포됐으나 상하이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극적으로 탈옥함으로써 또 한 번 의열단의 드라마를 만들었다. 이 와이탄 저격사건은 연재 4회에 상세하게 소개한 바 있다. 이 사건이 터지자 상하이 임시정부는 “과격주의로는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엉뚱한 해명을 내놓아 많은 조선인을 실망시켰다. 김원봉과 임시정부가 선명하게 대비되는 장면이다.

김원봉은 1924년 약 70명의 의열단 결사단원을 거느렸다. 미국의 작가 님 웨일즈는 김산을 인터뷰해 저술한 <아리랑>에서 1924년까지 일으킨 의열투쟁이 국내에서만 300여 건에 달하고, 1927년까지 체포돼 처형당한 의열단원이 무려 700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김원봉이 의열단을 창설한 것은 1919년 11월 9일 지린(吉林)성 지린시 광화루(光华路) 57호에서였다. 기록에 따르면 파호문 밖 중국인 판(潘)씨 집이었다. 의열단 창단 멤버인 이종암이 임대한 비밀 아지트였다. 지금은 번잡한 시가지가 된 그 자리에는 중국농업은행 건물이 들어서 있다. 물론 의열단과 관련된 표지는 없다. 물어물어 이곳을 찾아 은행 건물과 주소판 등을 찬찬히 뜯어보고 사진을 찍었다. 중년 여성 관리인이 나와서 쳐다보았다. 현지인들이야 100년 전 이곳에서 일군의 조선인들이 의열단을 결성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다.


▎의열단 군정학교 3기생들이 훈련받던 난징 교외의 톈닝쓰(天宁寺). 김원봉은 장제스(蔣介石)의 중화민국으로부터 자금·무기·인력 등을 지원받아 의열단 군정학교를 운영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100m 떨어진 큰 사거리 한쪽 모서리에는 지린시 사법국과 법률지원센터 등이 입주한 15층짜리 건물이 있다. 지린 감옥이 있던 자리다. 1927년 1월 말 안창호와 정의부 인사들이 중국경찰에 체포돼 구금됐던 곳이다. 1930년대에는 수많은 조선인 사회주의자가 고초를 겪은 곳이기도 하다.

의열단은 김원봉 등 13명이 모여 밤샘토론을 거쳐 결성했다. 김원봉은 단장격인 의백으로 선출됐다. 이때 김원봉의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의열단은 행동규범으로 ‘공약10조’를 만들고, 의열투쟁의 직접 목표로 ‘칠가살(七可殺)’과 파괴 대상 5가지를 정했다. 칠가살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 수뇌부, 대만총독, 매국적(賣國敵), 친일파 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이다. 파괴 대상은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매일신보사와 각 경찰서를 포함한 일제의 주요 기관 등이었다.

의열단 창단을 김원봉이 혼자 주도했다고는 할 수 없다. 나이와 경륜으로 봐도 그렇다. 그러나 창단 이후 김원봉이 의열단의 투쟁을 주도해나간 것에는 이견이 없다. 의열단 세 글자는 김원봉의 다른 이름이 된 것이다.

김원봉은 3·1 만세시위가 터지기 전에 이미 중국에 와있었다. 1917년 스무 살의 김원봉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첫째라고 생각하고 군사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부터 무장투쟁을 마음에 두었던 것이다. 김원봉은 당시 가장 강한 군대의 모델로 독일군을 상정하고 톈진의 덕화학당에서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여름 덕화학당이 급작스레 폐교됐다. 이후 김원봉은 영어권 국가가 세계 정세를 주도할 것으로 생각하고 1918년 9월 난징의 진링(金陵)대학으로 가서 영어를 공부했다. 진링대학은 훗날 난징대학으로 개명했다. 지금도 난징대학 정문 안쪽에는 진링대학 구지임을 알리는 표지가 있다.

당시 조선의 명망가들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내세운 민족자결주의에 주목하면서 파리강화회의(1919년 1월)에 대표를 보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생각이 달랐다. 전승국들이 자기들끼리 다투면서까지 전승국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의 독립을 거들 이유가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김원봉은 파리강화회의를 외교 교섭이 아니라 의열투쟁의 목표로 삼았다. 현장에서 일본 대표를 처단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김철성을 파리까지 보냈으나 누군가 권총과 실탄을 빼돌리는 바람에 거사 자체가 무산됐다.

곧이어 국내에서 3·1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김원봉은 이에 대해서도 크게 실망했다. 3·1운동은 무력항쟁이 아니라 비폭력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강도 일본에 비폭력으로 맞선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무모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김구보다도 앞서 나간 독립운동 궤적


▎‘프리실라’라는 닉네임을 쓰는 한 드로잉 작가가 필자의 톈닝쓰 소개 글을 읽고 화장품으로 그린 톈닝쓰 전경.
의열단은 1920년 초 베이징으로 이동했고, 앞에서 언급했던 일련의 투쟁을 차례로 거행해나갔다. 김원봉은 단원을 모집해 훈련하고, 자금과 폭탄을 구하는 한편 거사를 계획하고 대원을 파견하는 등 의열단을 이끌어나갔다.

어떤 거사는 성공했고 어떤 계획은 실패했다. 성패와 무관하게 결과는 항상 희생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원봉은 의열투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행보를 넓히기로 했다.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분열이 적지 않았던 독립운동단체들을 민족 유일당 수준의 정당으로 통합하고, 산하에 정규 군대를 창설해 일본과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김원봉은 인재 양성을 위해 1926년 의열단원 20여 명과 함께 광저우의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했다. 쑨원(孫文)을 만나 조선인과의 연대를 설득했던 것이다. 1930년 베이징에서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운영한 것도, 1932년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군정학교)를 개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35년 4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 졸업생 중 김원봉을 따르던 학생들이 난징으로 이동해 머물렀던 자오푸잉(教敷营) 16호의 현재 모습.
김원봉은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중국과 일본의 전운이 짙어지자 독립운동세력 통합에 나섰다. 그 결과 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의열단 등이 기존 조직을 해체하고 하나의 정당 조직으로 통합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이 결성됐다. 사회주의 성향의 의열단과 반공 우파의 네 정파가 통합한 것이고,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위원 7인 가운데 5인이 참여해 차후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기대할 만했다. 김원봉은 이를 통해 김구와 함께 가장 비중 있는 독립운동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은 김원봉의 기대만큼 성공적이지 못했다. 통합이 중국 관내와 미주에 국한되었고, 김구와 임시정부 사수파는 끝까지 불참했다. 실제 운영에서도 김원봉과 의열단 계열이 주류가 되면서 조소앙·홍진·이청천 등의 계열이 차례로 탈당함으로써 통합의 의미는 반감됐다.

그럼에도 김원봉의 통합운동은 계속 이어졌다. 민족혁명당은 중일전쟁(1937)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김규광)·조선혁명자연맹(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유자명)·조선청년전위동맹(최창익) 등 진보적 독립운동단체와 연합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창설했다. 그리고 1938년 10월 10일 우한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장대오로 김원봉을 대장으로 하는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1940년 충칭의 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전까지 김원봉은 정세 판단과 추진력, 조직 결성과 투쟁 전개에서 항상 김구보다 앞서 있었다. 임시정부가 명망가들의 외교교섭 전략이라는 헛발질을 하고 있을 때 가열차게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임시정부가 내분에 휘둘려 빈집이 되어있던 1920년대 중후반 김원봉은 이미 황푸군관학교를 거쳐 정당조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김구가 뒤늦게 의열투쟁을 도입해 신참인 이봉창·윤봉길을 보내 의거를 일으킬 때 김원봉은 조직화된 무장대오를 구축하기 위해 군정학교를 세우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민족 본위에 충실하면서 좌파 이념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었으니 이 역시 김구보다 한발 앞선 것이었다. 중화민국과의 교섭력에서도 김원봉은 뛰어났다. 1938년 100여 명으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2년 뒤엔 300여 명으로 확대한 것 역시 그의 정치력의 소산이다.

1930년대 김원봉의 흔적은 난징과 우한에서 더듬어볼 수 있다. 김원봉은 1932년 봄 의열단을 옮겨온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우한으로 옮기기 전까지 난징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난징에서 맨 처음 찾아간 곳은 톈닝쓰(天宁寺)라는 폐사다. 김원봉이 세운 군정학교 3기생들이 훈련받던 곳이다. 군정학교 3기생은 1935년 4월 1일 입교해 6개월간 교육받았다. 졸업생 가운데 만주 출신은 대부분 만주로 돌아가 지하활동을 했고, 나머지는 1, 2기 졸업생 가운데 난징에 잔류했던 운동가들과 합류해 민족혁명당(1935년 7월 결성)의 주축이 되어 활동했다. 나중에 이들은 김원봉이 창설한 조선의용대의 핵심이 되었다.

이름은 군정학교였지만 그 교사는 야산의 작은 절간이었다. 장제스(蔣介石)의 중화민국은 김원봉에게 자금·무기·인력 등을 지원해 의열단이 군정학교를 운영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일본을 의식해 비밀에 부쳤다.

톈닝쓰는 중국 인터넷 지도에서 바로 검색할 수 있었다. 난징 시내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룽 다다오역(龙眠大道站)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야오터우베이잔(窑头北站)이라는 버스 정류장까지 갔다. 이곳에서 1km 넘게 걸어 톈닝사 근처 저수지를 찾았다. 다시 지도를 보니 톈닝사는 저수지 동쪽 야산 중턱인 것은 분명했지만 산허리에는 키 큰 나무들이 빼곡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노완고(老頑固)’ 김구를 벗어나 김원봉의 휘하로


▎이들은 다시 후자화위안(胡家花园)으로 이동해 함께 생활했다. 민족혁명당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후자화위안은 청 말에 지은 난징의 대표적 개인 소유 원림이다.
마침 산중턱을 둘러친 담장이 있어 경비원에게 길을 물었다. 경비원은 길이 없어 못 간다고 뚝 자르고는 사라져버렸다. 길이 없다고 해도 뻔히 보이는 야산 중턱을 못 갈 것은 아니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저수지 아래 벽돌집 사이에 판자 몇 개로 어설프게 막은 틈이 보였다. 주인을 불러봤지만 응답이 없었다. 판자를 살짝 밀치고 들어가니 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이 보였다. 오솔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불현듯 나뭇가지에 걸린 ‘톈닝쓰’라는 작은 팻말이 눈앞에 나타났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마치 거물 김원봉을 직접 만난 듯했다. 조금 더 올라가니 겨울나무 사이로 허름한 집 한 채가 보였다. 독립기념관의 자료사진과 일치했다. 안팎을 살펴보니 폐사라는 말 그대로였다. 편액이 걸려 있던 자리에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그래도 누군가 가끔 들르는 듯했다.

폐사로 남은 김원봉의 비밀 군정학교는 일제 패망 이후 벌어진 김원봉의 안타까운 운명을 말해주는 듯 처연했다. 표지하나 없는 톈닝쓰의 사진을 블로그에 올렸더니 ‘프리실라’라는 닉네임을 쓰는 드로잉 작가가 화장품으로 그려 한 전시회에 출품했다. 김원봉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통했으리라.

난징 시내 화루강(花露岗)에 있는 후자화위안(胡家花园)도 김원봉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곳이다. 후자화위안은 위위안(愚园)이라고도 한다. 청 말에 지은 개인 소유 원림인데 1930년대에는 난징의 대표적 원림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1935년 4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 졸업생 중 김원봉을 따르던 학생들은 난징으로 이동해 자오푸잉(教敷营) 16호에서 함께 생활했다. 이들은 이후 이념과 노선에 따른 갈등으로 결별하는데, 김원봉을 따르던 졸업생들은 후자화위안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김원봉과 김규식 등 민족혁명당 인사들이 함께 생활했다. 민족혁명당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후자화위안에는 김원봉이 사용했던 묘오율원과 이연선림이라는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 이곳은 빈민촌으로 변모했다. 2016년 2월 이곳을 찾았을 때는 복원공사가 한창이었다. 빈민가가 일부 옆에 남아 있었다. 1년 뒤인 2017년 2월 다시 찾은 위위안은 고풍스런 강남의 원림으로 복원돼 있었다. 하지만 깔끔하게 복원된 후자화위안에서 1930년대 조선의 눈빛 형형하던 망명객들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마지막 분대장’ 김학철의 회고에 따르면 난징 시절 민족혁명당 청년당원들은 묘오율원 경내의 누관(樓觀)이라는 건물에 기거했다. 후자화위안 북측 담장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만나는 구와관시(古瓦官寺)라는 절이 바로 그곳이다.
후자화위안 북측 담장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구와관시(古瓦官寺)라는 절이 있다. 김원봉 당시의 묘오율원을 복원한 곳이다. 지난호에 소개했던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은 당시 생활을 회고록에 고스란히 담았다. 흥미로운 대목이 많다.

김학철의 회고록에 따르면 민족혁명당 청년당원들은 묘오율원 경내의 누관(樓觀)이라는 건물에 기거했다. 민족혁명당 지도층은 묘오율원 근처에 제각기 집을 잡아 살았다.

김학철은 이곳에서 가끔 김구도 마주쳤다고 한다. 독립운동의 큰 선배이자 어른이었던 만큼 대면해서는 김구 선생이라고 불렀지만, 뒤에서는 노완고(老頑固)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김구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지독하게 배제했던 탓이다. 김규식은 미주아저씨라고 불렀는데, ‘엉클 샘’을 우리말로 바꾼 것이다.

김원봉에 대한 인상도 흥미롭다. 김학철은 김원봉이 의열단 의백을 지낸 터라 굉장히 무섭게 생긴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보니 시골 중학교 교장선생님 같이 부드러운지라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고 했다. 심지어 가짜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학철은 이때 장제스와 김원봉이 합의한 육군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난징에 기거하던 ‘화루강패’는 1진으로 먼저 입교했고, 김학철을 포함한 ‘상하이패’는 조금 뒤에 오는 ‘광둥패’와 함께 2진으로 입교를 기다렸다. 이 가운데 김구 선생을 최고로 모시는 한국국민당 소속이던 김창만·이상조 등 몇몇 신참이 민족혁명당으로 넘어왔다고 한다. 김구가 좌파를 너무 심하게 배격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한다. 당시 독립운동 진영 안에서 벌어진 좌우 갈등, 세대 갈등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일본 경찰과 밀정이 화루강까지 따라 붙었던 사실도 흥미롭다. 화루강의 ‘동무’ 가운데 조선인 식당 관리원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난징의 일본 총영사관을 찾아가 자수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일본 사복경찰이 묘오율원을 찾아와 청년 당원들을 몰래 촬영하거나 야밤에 차를 대놓고 납치를 시도하는 괴변까지 발생했다.

우한(武汉) 지칭리에는 일본군 위안소의 흔적이…


▎김원봉이 다른 진보적 운동단체들과 연합해 세운 조선민족전선연맹은 우한으로 이동 후 한구(漢口) 일본조계 813가(현재의 胜利街) 15번지에 사무소를 설치했다. 지금도 낡은 2층 상가로 남아있다.
난징에서 창장(長江)을 거슬러 500여 km를 올라가면 우한(武汉)이다. 상하이에 이어 난징마저 일본군에 공격당하자 김원봉은 1937년 우한으로 옮겨갔다. 김원봉은 이곳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1938년 10월 10일의 일이다. 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의 독립투쟁 여정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조선의용대는 창설 이후 국민당 6개 전구 13개 전지에 배속돼 항일 전투에 참여했다. 조선인 대원들은 일본어 능력을 활용해 선전공작 등을 주로 담당하거나 목숨을 건 기습매복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조선의용대는 1940년 11월 충칭에서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화북과 만주로 북상할 것을 결의했다. 당시 화북에는 유민처럼 흘러들어오거나 일본군을 따라 온 조선인이 20여 만명이나 살고 있었다. 이들에게 주목하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만주를 거쳐 조국으로 진군하자는 것이었다.


▎김원봉은 1938년 10월 10일 의열단을 확대개편해 조선의용대를 만들고 3일 뒤 창설 경축행사를 가졌다. 지금의 우한시 리황포루(黎黄坡路)와 중산다다오(中山大道)가 만나는 곳에 있는 기독교청년회(YMCA) 한커우 구지다.
회의 결과 조선의용대 주력은 1941년 봄 황허(黃河)를 건너 타이항산의 중국 공산당 팔로군과 합류했다. 북상 직후 의용대원 전체가 참여하는 대토론을 거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했다. 이것은 단순한 편제개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조선의용대는 장제스 직할구역에서 벗어나 공산당 세력권으로 들어간 것이고, 이와 동시에 김원봉의 통솔에서 최창익의 지휘 아래로 옮겨간 것이었다. 이 시기 조선의용대는 팔로군과 합동으로 일본군과 치열하게 맞섰다. 희생도 적지 않았다. 이때 희생된 전사들은 다음 회에서 상세하게 소개할 예정이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는 다시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했다. 편제로는 대를 군으로 확대한 것이고, 내면으로는 조선의용군의 리더십이 김원봉·최창익에서 중국 공산당의 절대 신임을 받던 조선인 중공당원 무정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북상하지 않고 국민당 지역에 남았던 김원봉의 본대와 나머지 병력은 민족혁명당의 임시정부 참여 선언 이후 1942년 5월 광복군에 합편했다. 광복군 제1지대가 바로 조선의용대였다.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 겸 지대장으로 취임했다. 광복군은 조선의용대가 합류하면서 비로소 창설 당시의 초라함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원봉의 정치적 힘은 약화됐다. 북상해 팔로군과 합류한 조선의용대 주력을 직접 통할하지 못하게 됐고, 충칭에서는 임시정부에 참여한 뒤 광복군에 합편하자 국민당의 지원금도 임시정부로 창구가 단일화됐기 때문이다.

우한으로 김원봉을 찾아간 것은 2016년 1월이었다. 김원봉이 다른 진보적 운동단체들과 연합해 세운 조선민족전선연맹은 우한으로 이동 후 한구(漢口) 일본조계 813가(현재의 胜利街) 15번지에 사무소를 설치했다. 이곳은 지금 낡은 2층 상가로 남아 있다.


▎충칭 시절 김원봉이 거주했던 집. 다포두안정지에(大佛段正街) 172호. 한 칸짜리 상가로 약방 간판이 붙어 있지만 과일가게다. 장제스의 중국 정부가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충칭으로 이동하자 김원봉과 임시정부도 충칭으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곳은 지금의 후베이(湖北)성 총공회 자리로 추정한다. 우리가 검색을 통해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 단체사진이 바로 이곳에서 촬영한 것이다. 조선의용대 다섯 글자의 자모를 풀어쓴 군기가 이색적이다.

그해 10월 13일 조선의용대 창설 경축행사가 열렸다. 지금의 우한시 리황포루(黎黄坡路)와 중산다다오(中山大道)가 만나는 곳에 있는 기독교청년회(YMCA) 한커우 구지다. 당시 2층에는 대연회장이 있었다. 지금은 상가건물이다. 리황포루는 1897년 러시아 조계가 되었다. 우한시 정부는 기독청년회 구지를 포함해 근현대사를 상기시켜주는 서구풍의 건물 16동을 묶어 리황포루 가두박물관으로 지정했다. 리황포루가 중산다다오와 만나는 코너에 가두박물관 표지가 세워져 있다.

우한에서는 영화 <밀정>을 기획한 이진숙(영화사 하얼빈 대표) 씨가 동행했다. 이 대표가 지칭리(积庆里)라는 곳에 일본군 위안소 자리가 남아있으니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우한시 중산다다오 708호에는 제1차 국공합작 시기의 국민당 정부청사가 남아 있다. 일본군이 우한을 점령한 뒤에는 일본군 사령부로 사용했다. 이 사령부 바로 뒤가 지칭리(积庆里)다. 지금도 낡은 2층 건물이 촘촘하고, 머리 위로는 빨랫줄과 전깃줄과 통신 케이블이 뒤엉켜 어지럽다.

지칭리는 위안부 피해자 하상복 할머니가 짐승 같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던 곳이다. 지금도 당시의 건물과 골목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다.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온 당시의 조선인 여성들을 상상하면서 지칭리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지칭리 20호라는 주소가 보였다. 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하 할머니가 가장 극악한 국가폭력에 짓밟힌 채 죽지 못해 살던 곳이다. 하 할머니는 해방 후에도 귀국하지 못한 채 그곳에 눌러 살았다. 그러다 2016년 낙상해 크게 다쳐 한국으로 이송해 치료 중이다. 지금은 요양병원에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한 칸짜리 과일가게에서 만나는 영웅


▎우한 지칭리(积庆里) 일본군 위안소의 당시 모습을 그린 그림. 1992년 일본에서 발행된 <野戰予備病院‘ぁる衛生兵の私記’>에 나오는 그림이다. 제1차 국공합작 시기의 국민당 정부청사이자 나중에 일본군 사령부로 쓰인 중산다다오 708호 바로 뒤가 지칭리다. 지금도 낡은 2층 건물이 촘촘하고, 머리 위로는 빨랫줄과 전깃줄과 통신 케이블이 뒤엉켜 어지럽다.
조선의용대는 창설 직후 중화민국 군대의 우한 방어전에 참여했다. 중국군의 열세로 우한이 일본군에 함락되자 조선의용대 본부는 중국 중앙군의 이동로를 따라 광시좡족자치구의 구이린(桂林)으로 이동했다. 그 다음해인 1940년 3월에는 중국의 전시수도가 된 충칭으로 다시 옮겨갔다. 구이린에서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본부가 자리 잡았던 곳은 당시 주소로는 둥닝가 1호인데, 1959년 치싱궁위안(七星公園)이 조성되면서 당시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장제스의 중국 정부가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충칭으로 이동하자 김원봉과 임시정부도 충칭으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충칭에서 김원봉이 거주하던 집도 찾아볼 수 있다. 다포두안정지에(大佛段正街) 172호. 찾아가보니 한 칸짜리 상가였다. 약방 간판이 붙어 있지만 과일가게다. 장사하는 아주머니에게 이곳에 1940년대 해방 전까지 한국인 혁명가가 살았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과일 두 봉지를 사면서 나중에라도 한국인이 찾아와 기웃거리면 그 혁명가를 찾아온 한국인인 줄 알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돌아섰다.

김원봉의 거주지와 멀지 않은 창장 변에 조선의용대 본부가 있었다. 차오톈먼다저(朝天门大桥)와 다포시다저(大佛寺大桥)의 중간으로 창장 동안이다. 지금은 큰 공사중이어서 당시의 흔적은커녕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창설 직후 우한 방어전에 참여했던 조선의용대는 우한이 일본군에 함락되자 중국 중앙군의 이동로를 따라 구이린(桂林)으로 이동했다. 구이린에서 조선의용대 본부가 자리 잡았던 둥닝가 1호. 1959년 치싱궁위안(七星公園)이 조성되면서 당시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김원봉이 대중적으로 되살아난 계기는 <암살>과 <밀정>이라는 영화 두 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영화의 스토리를 받쳐주는 역사적 사실이 의열단이었고, 두 편 모두에 김원봉이 특별출연했다. 그동안 역사 연구자의 논문에서 또는 역사에 관심이 깊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다 이제야 대중적 역사인물이 됐다. 진작 그리 됐어야 할 인물이다.

김원봉은 어떤 존재인가? 자신의 시대를 어떻게 살았느냐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 나아가 오늘날에도 김원봉의 구체적 발상법이나 태도에서 배울 것이 많다.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이 한가롭게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도와줄 리 없다는 김원봉의 냉철한 판단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유효하다. 미국이 동맹이니 도와줄 것이라든지, 중국이 대국인데 그러면 되겠느냐는 식의 안이한 태도로는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독립이라는 공동체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 상호 갈등하는 이념들을 어떤 태도로 어떤 넓이로 수용할 것인가는 오늘날에도 중차대한 과제다. 이런 면에서도 김원봉은 깊이 음미할 가치가 있다. 그는 민족 본위를 앞세워 자신이 용인하는 이념적 스펙트럼을 넓히고 많은 사람을 받아들였다. 이념이 다양한 견해의 다른 표현이라고 한다면 김원봉이 품었던 이념의 스펙트럼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스펙트럼과 일치하는 게 아닐까.

최근 들어 김원봉을 기억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 같아 그나마 위안이 된다. 하지만 이는 김원봉에 대한 기억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역사를 공부하고 그 현장을 찾아가는 이유다.

윤태옥 - 중국 인문 다큐멘터리 전문 제작자. 2006년 <다큐멘터리 인문기행 중국(7부작)>(MBC플러스)을 기획, 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매년 6개월 정도 중국을 여행하면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거나 중국 문화와 역사에 관한 글을 쓴다. 저서 <개혁군주 조조 난세의 능신 제갈량> <중국식객> <중국민가기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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