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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신라 최고의 색녀(色女)이자 여장부였던 ‘미실(美室)’
글쓴이 tntv 등록일 [2018.12.29]
▲ MBC드라마 〈선덕여왕〉에서의 미실(고현정 분).

신라 최고의 색녀(色女)이자 여장부였던 ‘미실(美室)’

⊙ 眞僞 논란 있는 《화랑세기》, “근세 어떤 사람의 역사소설”(이기동) vs. “骨品 사회 신라에서 필요한 내용들”(이종욱)
⊙ 진흥왕·진지왕·진평왕 3代를 비롯해 사다함 등 수많은 화랑들과 通情
⊙ 첫 남편, 두 아들, 동생이 風月主 지내


엄광용
1954년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한국사 전공) 수료 / 1990년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문단 데뷔. 창작집 《전우치는 살아 있다》 외 다수. 2015년 장편역사소설 《사라진 금오신화》로 제11회 류주현문학상 수상

글 | 엄광용 소설가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다. 그러나 그것을 저술하는 과정에서 역사가의 취사선택에 의해 어떤 것은 드러나거나 과대 포장되고, 또 어떤 것은 이면으로 숨거나 간략하게 언급되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역사가에 따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상이(相異)하고, 역사 해석의 기준과 역사 발전 법칙의 체계가 다를 수 있다. 이를 일러 사관(史觀)이라고 한다.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신라 시대 최고의 미인이자 색녀(色女)로 왕실의 남자들을 유혹해 권력을 휘두른 여장부 미실(美室)에 대한 기록을 완전히 배제해 버렸다. 일연(一然)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그 많은 신화적인 화제 인물들 중에서 미실은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의 화랑(花郞)을 주제로 한 기사에서 미실을 언급하지 않고는 제대로 사실을 기록했다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미실은 신라 왕 3대에 걸쳐 활동한 화랑의 우두머리 풍월주(風月主)들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풍월주와 연인 관계를 맺기도 했으며, 심지어 남동생을 풍월주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자기 마음대로 풍월주를 세우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미실을 신라 화랑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이(所以)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오랜 기간 미실은 시간의 벽 속에 갇혀 있었다. 신라 당대의 인물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세기(花郞世紀)》를 저술했다는 기록은 몇몇 사서를 통해 소개되고 있으나, 진본이 없으므로 내용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20세기 말에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미실은 역사의 이면에 숨어 있다가 마침내 실체를 드러내 신라 최고의 미녀이자 여장부임이 밝혀지기에 이르렀다.

 
 《화랑세기》 필사본의 眞僞 논란
 
《화랑세기》 필사본을 세상에 알린 박창화.
  1989년에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김경자씨 소장)은 32쪽에 불과했으나, 1995년에 162쪽 분량의 또 다른 필사본이 나와 학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필사본은 일제(日帝)시대 때인 1933년에서 1944년까지 10년간 일본 궁내성(宮內省) 도서료(圖書寮)의 조선전고조사(朝鮮典故調査) 사무촉탁으로 있던 역사가 박창화가 필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1989년 필사본을 복사해 갖고 있던 노태돈 박사(서울대 교수)는, 그것이 《화랑세기》 모본에 해당하며 진위를 판별한 결과 위작(僞作)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기동 박사(동국대 교수)도 필사본 《화랑세기》의 내용이 궁중 귀족 출신 여성의 연애담과 애욕을 기록한 것은 진본으로 믿을 수 없다고 진단했다. 더구나 김대문은 풍월주를 배출한 가문이므로 조상을 욕되게 하는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누군가에 의해 창작된 위작이라고 했다.
 
  원래 《화랑세기》는 28세 풍월주 오기공이 화랑의 세보(世譜)를 작성하다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그의 아들 김대문이 내용을 더 보태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김대문의 역대 조상은 풍월주 출신이 많았다. 오기공의 부친 예원공은 20세, 예원공의 부친 보리공은 12세, 보리공의 부친 이화랑은 4세, 이화랑의 부친 위화랑은 1세 풍월주였던 것이다. 이처럼 역대 풍월주들로 이루어진 김대문의 가계(家系)야말로 화랑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종욱 박사(서강대 교수)는 《화랑세기》 필사본에 대하여 “근세 어떤 사람의 역사소설”이라고 한 이기동 박사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그것은 소설적인 구성이 아니라 골품(骨品) 사회 신라에서 필요한 내용들”이라고 주장했다. 일반인에게 그 내용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비로 그 이후부터였다.
 
  《화랑세기》 필사본을 진본이라고 주장한 이종욱 박사는 1999년 직접 그것을 역주(譯註)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또한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2000), 《화랑》(2003) 등의 저술을 통하여 화랑의 역사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했다.
 
  다른 한편으로 향가를 연구한 국어국문학의 신진학자인 신재홍 박사도 《화랑세기 역주》(2009)를 내놓았다. 그는 필사본의 진위 문제를 떠나 그 내용이 이제까지 묻힌 역사, 내밀한 역사였던 것을 마침내 육감적인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 역주본의 머리말에서 “향가 연구가 《화랑세기》와 만나는 지점이 여기이다. 《화랑세기》는 앙상한 《삼국사기》, 꿈같은 《삼국유사》와는 상당히 다른 위치에 놓인 역사서이다. 이 자료에 기술된 인물과 사건은 간략하지만 생동감이 넘친다”고 역주 작업을 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이 역주본과 기타 연구 저술로 세상에 나오자, 일반인들의 관심도 높아져 소설로 재구성되고, TV 드라마로 제작되기까지 했다. 한때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김별아 작가의 《미실》과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미실을 신라 당대에 화랑도를 이끌었던 여장부로 묘사했다.
 
  아직까지도 역사학자들 사이에 《화랑세기》 필사본에 대하여 진본이냐 위서냐의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이미 ‘미실’이란 인물은 일반인들 사이에서 아주 생동감 넘치는 신라의 대표적인 여성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면 과연 일제시대 때 역사가 박창화가 필사했다는 《화랑세기》에서 미실은 어떤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을까? 각 화랑들을 소개한 조(條)에 산재되어 있는 그녀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신라 여인의 모습을 제대로 훔쳐볼 수 있을 것이다.
 
 
  미실의 어머니 묘도
 
  《화랑세기》 하종(夏宗) 조에는 미실의 어머니 ‘묘도’와 그녀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법흥제(필사본에는 왕을 ‘제’로 표기했다)가 영실공과 함께 궁궐 안뜰에서 축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옥진 궁주가 잠이 덜 깬 눈에 머리를 풀어헤친 채 와서 법흥제의 손을 이끌며 말했다.
 
  “좋은 꿈을 꾸었으니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함께하심이 좋겠사옵니다.”
 
  이 같은 옥진의 유혹에, 법흥제가 물었다.
 
  “무슨 꿈이더냐?”
 
  “칠색조(七色鳥)가 가슴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법흥제가 웃으며 일렀다.
 
  “칠색은 섞인 색이요, 새는 여자이니 빈첩(嬪妾)을 낳을 조짐이다. 네 남편과 함께함이 좋겠다.”
 
  옥진은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자 법흥제가 다시 말했다.
 
  “네 남편과 짐은 일체이니 아들을 낳으면 응당 태자로 세우고 딸을 낳으면 빈(嬪)으로 삼으리라.”
 
  그제야 옥진은 기뻐하였으며, 영실과 함께 장막 안으로 들어가 사랑을 나누었다.
 
  과연 딸을 낳으니 옥진은 법흥제의 말이 신명하다 여기고, 딸의 이름을 ‘묘도(妙道)’라고 지었다.〉
 
  법흥왕과 영실공은 외숙과 조카 사이였다. 즉 법흥왕의 여동생인 보현공주의 아들이 영실공이었던 것이다. 《화랑세기》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옥진은 법흥왕과 영실공 두 남자를 공개적으로 섬기고 있었다. 옥진이 칠색조 꿈을 꾼 후 법흥왕과 잠자리를 같이하자고 유혹한 것은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날 아들을 왕으로 만들겠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그녀로서는 성골(聖骨)의 아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무튼 옥진과 영실공 사이에서 태어난 묘도가 성숙한 뒤, 법흥왕은 약속대로 묘도를 자신의 빈으로 삼았다. 그러나 법흥왕의 양물(陽物)이 너무 커서 묘도는 저녁이면 매우 괴로워했다. 그것을 알고 법흥왕은 점차 잠자리를 멀리하였는데, 그 사이 묘도는 2세 풍월주인 미진부(未珍夫)공을 사랑하게 되었다. 바로 미실은 묘도와 미진부공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七色鳥’의 영기를 받고 태어난 ‘미실’
 
  《화랑세기》 하종(夏宗) 조에는 묘도 탄생 이야기에 이어 미실이 태어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때 다시 옥진의 칠색조 꿈 이야기가 재현되고 있다.
 
  〈어느 날 옥진 궁주가 꿈을 꾸었는데, 자신의 가슴에서 칠색조가 날아가 묘도에게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놀라 깨어나 생각하니 그 꿈이 너무도 기이하게 여겨졌다. 그녀는 몰래 딸 묘도의 침실을 엿보았다. 이때 묘도와 미진부공은 한창 사랑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나중에 옥진은 묘도에게 말했다.
 
  “너희 부부가 이제 귀한 딸을 낳겠구나.”
 
  과연 묘도와 미진부공 사이에서 미실이 태어났다.
 
  미실은 용모가 절색인 데다 풍만하고 도톰한 살결이 옥진을 꼭 빼어 닮았다. 뿐만 아니라 밝고 총명함이 벽화(壁花·소지왕의 후궁)에 버금갔고, 아름다움 또한 오도(吾道·옥진의 어머니)와 견줄 정도로 백 가지 꽃의 영검함이 하나로 뭉쳐 있었다. 가히 세 미인의 정수를 모아 놓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여기서 ‘세 미인’은 신라 당대의 미인으로 손꼽히는 벽화·오도·옥진을 이르는 것이니, 그녀들의 아름다운 정수만을 모아 놓은 듯한 미실이야말로 최고의 미인이 아닐 수 없었다. 옥진의 칠색조 태몽으로 태어난 묘도가, 다시 옥진의 칠색조 태몽으로 딸을 낳았다. 그러므로 미실은 모계 2대에 걸쳐 기이한 태몽으로 태어난 ‘칠색조의 칠색조’와도 같은 미인임을 《화랑세기》 기록은 밝히고 있는 것이다.
 
 
  미실과 사다함
 
  미실의 할머니 옥진 궁주는 오도와 풍월주 1세인 위화랑(魏花郞)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옥진은 손녀 미실을 일러 “이 아이는 우리의 도(道)를 부흥시킬 만하다”고 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교태 부리는 법과 노래와 춤을 가르쳤다. 여기서 ‘도(道)’는 옥진 궁주의 어머니 ‘오도(吾道)’를 가리키는 말이다. 어머니가 1세 풍월주 위화랑을 모신 것처럼, 옥진에게는 미실을 화랑계에 풍미(風靡)할 만한 인물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던 것이다.
 
  신라의 화랑들은 주색(酒色)을 즐겼다고 한다. 이종욱 박사는 저서 《화랑》에서 ‘대부분의 화랑들이 낭두(郎頭)의 딸을 첩으로 거느렸다. 그리고 유화와 관계를 가졌다’고 했다. 낭두는 화랑도 조직 중 화랑과 낭도 사이에 위치한 화랑 집단으로, 화랑들의 수하에 속하는 부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유화(柳花)는 술집에서 종사하는 여자를 뜻한다. 근세에까지도 “남아대장부는 풍류와 주색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던 것처럼, 당시 신라의 화랑들에게 있어서 ‘주색’은 크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사내다움의 표상이었다.
 
  따라서 옥진은 손녀 미실을 화랑들 위에 군림하는 인물로 만들기 위해 색공(色供)의 방법을 가르쳤다. 즉 색(色)으로 남자를 미혹에 빠지게 만드는 방법을 터득토록 하여, 미실로 하여금 먼저 궁중에 들어가 지소 태후와 세종 전군을 모시도록 했다. 법흥왕의 딸인 지소 태후는 아들 진흥왕이 7세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한 인물이고, 세종 전군은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異父同腹) 진흥왕의 동생이다.
 
  미실은 먼저 세종 전군에게 색공을 바쳤다. 그러나 세종 전군의 몸이 허약해 잠자리를 감당하지 못하자, 지소 태후는 아들의 건강을 염려하여 미실을 궁에서 내보냈다. 이때 미실은 궁 밖 생활을 하다 화랑 사다함을 만났고, 사통하여 부부가 될 것을 약속했다.
 
  한편 지소 태후는 아들 세종 전군에게 융명(肜明)을 재취토록 명했다. 그러나 세종 전군은 미실을 잊지 못해 병이 들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지소 태후는 미실을 다시 궁궐로 불러들였다.
 
  미실이 사랑한 화랑 사다함은 할머니 옥진의 여동생 금진의 아들로, 외가의 촌수로 따지면 5촌 관계였다. 그러나 사다함은 가야 정벌을 위해 전쟁터로 떠났고, 그 사이 지소 태후가 미실을 궁궐로 불러들여 세종 전군과의 사이에 아들 하종을 낳았다.
 
  그 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사다함이 친구 무관랑의 죽음을 애통해하다 7일 만에 죽었다고 하는데, 기실은 그가 사랑하던 미실이 세종 전군의 여자가 된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미실의 아들 하종은 나중에 11세 풍월주가 되었는데, 그의 용모가 사다함과 닮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서라벌에서는 미실이 이미 궁궐로 다시 들어가기 전에 사다함의 씨를 잉태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진흥왕·진지왕·진평왕 3代와 通情
 
  그 이후 미실의 음사(陰事)는 권력을 잡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녀는 진흥왕의 아들인 태자 동륜(東輪)과 관계를 맺고 아이를 임신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진흥왕이 미실을 부르자, 그녀는 거침없이 잠자리에 응해 음사를 펼쳤다. 이렇게 하여 진흥왕과 미실 사이에 아들 수종(壽宗)이 태어났다.
 
  한편 태자 동륜은 부친 진흥왕의 후궁 보명(寶明) 궁주와도 사통했는데, 어느 날 보명궁의 담을 타넘다 개에게 물려 죽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진흥왕도 세상을 떠났다. 이때 미실은 진흥왕의 사망 사실을 숨기고, 다음 왕위를 잇게 될 둘째아들 금륜(金輪)을 두고 왕후인 사도(思道)와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금륜과 잠자리를 같이하되, 이후 절대로 다른 마음을 먹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느냐?”
 
  “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미실은 새로 왕위를 이어받을 금륜에게 색공을 하여 권력을 잡고자 했다.
 
  곧 미실은 금륜에게 색을 가르쳤다. 그녀는 진지왕이 된 금륜의 사랑을 독차지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러자 진지왕은 정사를 미실에게 맡기고 아예 주색에 빠져 유화들과의 황음(荒淫)을 즐겼다.
 
  이때 실망을 한 미실은, 남편 세종과 사도 태후의 오빠 노리부(弩里夫)를 동원해 진지왕을 폐위(廢位)시켰다. 그리고 동륜의 아들 백정(白淨)을 왕으로 삼았는데, 그가 바로 진평왕이다.
 
  미실은 진평왕과도 잠자리를 같이해 색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동시에 진지왕을 폐위시킬 때 화랑으로 공을 세운 설원랑(薛原郞)과도 관계를 맺었다. 미실은 진평왕과의 사이에서 딸 보화(寶華)를 낳았고, 설원랑과 사통해 아들 보종(寶宗)을 얻었다.
 
  미실은 이처럼 진흥왕·진지왕·진평왕 3대에 걸쳐 역대 왕들과 사랑을 나누었으며, 그와 동시에 화랑들과도 사통을 했다. 미실은 이미 진흥왕 때 화랑의 전신인 원화의 부활을 요청해, 스스로 원화가 되어 화랑들을 진두지휘했다.
 
 
  쓸쓸한 최후
 
  미실의 첫 남편인 세종 전군이 6대 풍월주가 된 것을 시작으로, 친동생인 미생공이 10대 풍월주, 세종 전군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하종이 11대 풍월주가 되었다. 특히 미실의 남동생인 10대 풍월주 미생공은 처첩이 수도 없이 많아 아들이 100여 명에 이르러 그 자신도 모두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미실이 노후(老後)에 병에 걸려 권력을 잃고 궁궐을 떠난 뒤의 일이지만, 설원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보종공이 또한 16대 풍월주가 되었다.
 
  ‘권력무상’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생을 화려하게 지냈던 미실도 최후는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진평왕 28년에 이름 모를 병(奇疾)에 걸린 그녀는 궁궐을 떠나 설원랑과 함께 유랑생활을 했다. 마지막에는 법흥왕비와 진흥왕비가 만년(晩年)에 여승(女僧)으로 머물렀던 영흥사(永興寺)에서 병고로 갖은 고생을 하였다.
 
  이때 병간호를 하던 설원랑이 먼저 미실과 같은 병을 얻어 죽고 나서, 미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을 볼 때 미실이 앓았던 병이 만성 전염 피부병인 대마풍(大麻風·문둥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 최고의 미녀인 미실이 노년에 가서는 코와 귀가 떨어져 나가는 흉측한 모습으로 죽었다고 생각할 때, 실로 인생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녀가 죽을 때의 나이는 58세였다.
 
 
  신라 왕실의 골품제가 만든 ‘근친상간’
 
《화랑세기》의 신빙성을 인정하는 이종욱 박사.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을 보면 남녀 간의 사랑이 난잡하게 느껴질 정도다. 특히 미실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신라의 골품제도를 살펴보면 근친상간(近親相姦)과 같은 난잡한 성행위(性行爲)가 당시에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고대(古代) 이래 역사학자들은 윤리적인 잣대를 가지고 《화랑세기》의 내용을 애써 배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종욱 박사는 그의 저술 《화랑》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고려나 조선의 역사가들도 화랑도를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서거정은 《화랑세기》를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화랑세기》에 나오는 화랑도에 대한 사실들은 전하지 않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이겠는가?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왕 중심의 역사를 기술하는 《삼국사기》나 《동국통감》 등의 사서에서 화랑도는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로서는 《화랑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김부식이나 서거정 등은 《화랑세기》에 나오는 신라인들의 근친혼 등 유교적 윤리에 어긋나는 이야기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수 있다.〉
 
  신라의 골품제도를 보면 왕족으로는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이 있다. 이 두 계급에서 왕이 배출되는데, 성골은 부모가 다 순수 왕족 혈통이어야 하고 진골은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반드시 왕족이어야 한다. 성골만이 왕과 함께 궁궐에서 대대로 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며,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왕족이라 진골이 된 경우 그 당사자인 왕이 죽으면 궁궐에서 나와 살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골품제도 때문에 신라에서는 왕이 되고 그 자손이 궁궐에 남기 위해서는, 오직 직계 혈통의 왕족끼리 결혼을 해 성골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골로 왕을 배출하기 위해서는 근친상간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윤리적인 잣대로 따질 수 없는 당대의 신라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규범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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