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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여자의 역사①]조선음식 146가지 레시피를 남긴 장계향
글쓴이 tntv 등록일 [2020.09.04]

 

[여자의 역사①]

 

조선음식 146가지 레시피를 남긴 장계향

▶ '페미니즘 비난' 논란 부른 이문열 소설의 주인공
장계향(1598-1680)의 13대손인 작가 이문열은, 의도한 바는 아닐테지만 그의 위대한 할머니를 바이러스 마케팅으로 세상에 알린 셈이 됐다. 1997년에 낸 소설 '선택'(민음사)은 이 땅의 페미니스트를 옛 여인의 목소리를 빌려 꾸짖었다.

책이 나오자 당시 여성계는 발칵 뒤집혔고, 이문열은 마초주의의 대명사로 지목되었으며 책 속의 장씨는 '이녀제녀(以女制女, 여자로써 여자를 제압함)'의 꼭두각시처럼 여겨지게 됐다. 이문열은 당시 그녀의 이름을 몰랐다. 소설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조선 왕조 선조 연간에 태어나 숙종 연간에 이 세상을 떠난 한 이름없는 여인의 넋이다. 이 세상에서 나를 특정하는 유일한 기호는 아버지의 핏줄을 드러내는 장(張)이라는 성씨와 훌륭한 아들을 기려 나라에서 내린 정부인(貞夫人)이라는 봉작 뿐이다."(소설 '선택' 7쪽)
안동MBC에 소개된 장계향.

안동MBC에 소개된 장계향.



▶ 장씨의 사당 신위 뒤에서 우연히 이름 발견

2002년 지역 사학자인 배영동(49.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이 장씨의 사당을 학술적으로 조사하다가 그녀의 이름이 장계향인 것을 발견한다. 조선의 여염집 여인이 당호(堂號)가 아닌 당당한 이름 세 글자로 등장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그것을 원했을까. 섣불리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녀의 생(生)은 스스로의 뛰어남을 감추고 평생에 걸쳐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들을 돋우는 조선여자의 길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75세(1672)의 어느 날 내놓은, 한글로 된 요리 레시피 한권은 340년 이후 그녀를 역사적인 '유명(有名)' 인사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1999년 문화관광부는 그녀를 '1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고, KBS TV '역사스페셜'은 조선의 요리서 '음식디미방'을 집중조명한다.

디미는 지미(知味)의 옛 표현으로 음식디미방은 '마시고 먹는 것의 맛을 이해하는 노하우'로 풀 수 있다. 이후 '음식디미방'은 그녀가 살았던 경북 영양군의 대표적인 문화브랜드로 떠올랐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지역 관광사업을 위한 야심찬 밥상을 차리고 있는 중이다.

▶ 신사임당과 비교할 분이 아니다?

장계향에 관한 글을 다루기 위해 영양 두들마을을 찾았다. 처마로 들이붓는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고난 다음, '음식디미방' 체험실과 장계향 기념관이 마을길 줄기에 가지처럼 붙어있는 언덕길을 걸었다. 작가 이문열이 어린 시절 기거했던 집 또한 하나의 가지를 이루고 있었고, 그가 큰 돈을 내놓아 지자체와 함께 2001년에 지은 광산문학연구소도 웅장한 풍채로 거기 앉아있었다.

이문열은 소설 '선택'에서 장씨를 말하면서 '큰 어머니'의 개념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할머니'란 말은 '한 어머니'를 줄여서 쓰는 말이며, 이 때의 '한'이란 백모(伯母)를 의미할 때의 형제 서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든든한 둘레이자 힘있는 중심을 이루는 크나큰 무엇을 의미한다고 한다. 장계향은 그런 의미에서 조선의 '대모(大母)'였으며, 여전히 지금까지도 그 울림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라는 게 작가의 인식 기반이다. 대모라면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신사임당이 떠오르지 않는가. 영양에서 만난 장씨의 12대손 이명태(76)는 "정부인 장씨는 사임당 신씨와 비교할 분이 아니다"고 잘라 말한다. 그보다 윗길이라는 것이다. 여기엔 가문에 유전하는 경쟁심같은 것이 어른거린다.

계향의 아버지는 경당(敬堂) 장흥효(1564-1634)이다. 주역에 뛰어난 학자로 중국의 '역학계몽통석'(송나라 호방평의 저술)의 절기(節氣)에 관한 도표를 20년 연구 끝에 새롭게 정리해 당대의 지식인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던 사람이다. 그가 당호에 경(敬)을 넣은 것은 퇴계 이황에 대한 깊은 숭모(崇慕)에서이다. 퇴계는 하늘과 땅과 사람을 공경하는 '경(敬)'의 철학자이다. (퇴계의 경(敬) 철학은 일본에까지 건너가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는 기틀이 되기도 한다.)

▶ 퇴계학의 정통을 이은 가문

장흥효가 퇴계의 경(敬)을 자신의 호로 삼았던 것은, 퇴계 학통의 적자(嫡子)임을 자부했기 때문이다. 퇴계의 뛰어난 제자로는, 월천 조목, 간재 이덕홍, 학봉 김성일, 한강 정구, 서애 유성룡, 지산 조호익 등을 꼽는다. 장흥효는 임진왜란 전에 김성일에게서 배웠고 1599년에는 검제로 온 유성룡과 사제연을 맺어 8년간 공부를 했다. 또 1608년에는 한강 정구가 안동부사로 부임해, 다시 그 문하에 들었다. 즉 퇴계의 고제(高弟, 뛰어난 제자) 3명에게서 전수를 받았으니, 가히 적통이라 할 만하다.

장흥효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무남독녀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장계향이다. 아버지의 명석함과 열정을 빼닮은 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녀가 남긴 지필묵의 흔적은 대개 결혼하기 이전인 열 아홉해의 자취이다. '조선조 여류시문전집2'(2001년. 태학사, 허미자편)에는 한시 7수, 편지 한통이 수록되어 있다. 학문적 열정을 엿볼 수 있는 시 몇 편을 먼저 구경하자.

▶ 퇴계의 시조와 비슷한 한시를 쓴 소녀

성인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기에/ 성인의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성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네/ 성인의 마음은 볼 수가 있네

不生聖人時(불생성인시)
不見聖人面(불견성인면)
聖人言可聞(성인언가문)
聖人心可見(성인심가견)


'성인음(聖人吟)'이란 제목의 장계향 시는, 놀랍게도 퇴계의 시조 한 수와 빼닮았다.


고인은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봬
고인을 못 뵈고 녀던(가던) 길 앞에 있네
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녀고 어떨꼬
퇴계의 시조 '고인은 날 못보고'

퇴계의 적전(嫡傳)을 이어받았다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이미 드리워져 있지 않은가. 퇴계의 '고인(옛사람)'은 장계향에 와서는 '성인(聖人)'으로 바뀌면서 공맹(孔孟)과 퇴계를 우러르는 마음의 기울기를 더욱 가파르게 해놓고 있다. 장흥효는 딸에게 거듭거듭 퇴계의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녀는 성인의 말씀과 마음을 대하면서 퇴계처럼 되고자 했을 것이다.

경북 영양의 장계향 기념관에 있는 흉상.

경북 영양의 장계향 기념관에 있는 흉상.



▶ 가난하고 힘없는 자의 고통을 기록한 시

그녀의 뜨거운 가슴을 느낄 수 있는 시 한편이 있다. 여종에게서 마을의 소식 한 자락을 들었다. 젊은 아낙 하나가 남편을 군역(軍役)에 보냈는데, 늙은 시어머니는 그만 병이 들어 누웠다. 죽음을 예감한 시어머니가 문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들을 찾겠다면서 맨발로 뛰쳐나간다. 며느리는 그 뒤를 쫓아가며 눈물을 흘린다. 그 소동을 지켜본 여종이 저도 눈물을 훔쳐가며 이야기를 풀어놓자 계향은 문득 붓을 들어 시를 쓴다. 그것이 '鶴髮三章(학발삼장)'이다.

흰 머리 병들었네
아들 만리길 떠났기에
만리 떠난 아들
어느 달에 돌아오나
흰 머리 병을 안고
해지는 서산에서
손 들어 하늘에 기도하네
하늘은 어찌 이리 막막한가
흰 머리 병을 부축해
일어섰다 넘어졌다
오늘 이렇게 되었으니
찢은 옷자락 어찌하나


鶴髮臥病 行子萬里 行子萬里 曷月歸矣(학발와병 행자만리 행자만리 갈월귀의)
鶴髮抱病 西山日迫 祝手于天 天何漠漠(학발포병 서산일박 축수우천 천하막막)
鶴髮扶病 惑起惑복(足+培) 今尙如斯 絶거(衣+居)何若(학발부병 혹기혹북 금상여사 절거하약)

▶ 암산의 천재가 나타났다

어린 장계향의 천재성을 말해주는 예화로는 열 살 무렵의 '원회운세(元會運世)' 스토리가 자주 꼽힌다. 장흥효는 북송의 성리학자인 소옹(邵雍, 강절선생 1011-1077)의 학문적 성취를 깊이 동경했다. 그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 유교의 역(易)을 발전시켜 음양(陰陽)이라는 두 개의 요소로 우주의 현상을 설명하는 2원법에서 나아가, 음양강유(陰陽剛柔)의 4원법 패러다임을 설정하고 만물을 재해석한다. 즉 4의 배수로 설명하는 것이다.

장흥효는 이 내용을 제자들에게 열심히 설명한다. 우리는 가까운 시간은 잘 알고 있지만 멀고 긴 시간에 대해선 잘 모른다. 여덟 각(刻)은 한 시(時)를 이루고 열두 시는 한 날(日)을 이루며 서른 날은 한 달(月)을 이루고 열두 달은 한 해(年)를 이루는 것은 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소강절은 '원회운세'의 큰 시간을 말해준다. 세(世)는 30년이 모인 것으로 인간의 한 대(代)를 말한다. 인간은 대개 2개의 세(世)인 육십년을 살다가 가게 되어 있다. 세가 열둘이 모이면 운(運)이 된다. 그러니까 1운은 360년이다. 서른 운은 한 회(會)가 되고, 열 두개의 회(會)가 모이면 원(元)이 된다. 신기원을 열었다고 할 때의 그 원이다.

장흥효는 이에 관해 열변을 토할 때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는 제자들을 대하면서 좀 답답했다. 강의가 끝난 뒤 자신의 강의를 기둥 뒤에서 엿듣고 있던 딸에게 묻는다.


"회(會)는 무엇이고, 원(元)은 무엇이냐?"
"회는 제가 계산해보니, 1만 800년이고 원은 따져보니, 12만 9600년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주판이나 디지털 계산기가 없는 시절에 아이가 암산으로 곱셈을 해낸 것이다.

▶ 식구 14명을 챙겨야 하는 시집살이


장계향은 아버지의 제자였던 이시명의 재취(두번째 결혼) 부인으로 들어간다. 이시명은 퇴계학에 정통했던 학자였다. 이조판서 정경세가 그를 아껴, 자신의 사위와 함께 공부를 해줄 것을 권유했다. 이시명은 "판서의 사위와, 같은 집에 머물러 친분을 도모한다면 곧은 선비들이 비웃을 것"이라며 거절했다. 결혼 이후 장계향은 책과 붓을 모두 버렸다.

결혼한 뒤 시집에 들어와보니 온통 초상집이었다. 남편의 전취 부인인 광산김씨가 돌아간데다, 4년전에는 이시명의 둘째형(우계)과 맏형(청계)가 잇따라 세상을 떴다. 두 형제의 부인은 둘 다 무안 박씨로 종반간이었는데 이어서 순절을 한다. 이런 가운데 19세 새색씨는 시부모, 시동생 둘에 청계의 다섯 자식과 남편의 전처 소생 3남매를 포함해 남편까지 무려 14명에 대해 신경써야 했다.

그런 와중에 전처 아들 이상일은 '칠산림(七山林, 벼슬 안한 7인의 뛰어난 유학자)'으로 손꼽히는 학자로 키워냈고 둘째아들 이휘일은 퇴계학파의 정통이 되었다. 셋째아들 이현일은 이조판서가 되었고 넷째아들 이승일, 이정일, 이융일, 이운일도 학명을 모두 학명을 날렸다.

아들 중에서 두 사람(휘일, 현일)이나 불천위(不遷位, 큰 공적을 기려 위폐를 치우지 않음) 제사를 받는다. 그녀가 낳은 첫아들 이휘일조차도 어머니가 결혼전에 뛰어난 학자이자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그가 병에 들었을 때 한자 서신을 받고나서야 눈치를 채고, 그의 외가를 뒤져 어머니의 글들을 찾아냈다고 한다.

▶ 아들 후손의 서가에서 발견한 음식디미방

이제 '음식디미방'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됐다.

1960년 경북대교수였던 김사엽씨는 이휘일의 후손 서가를 훑다가 우연히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논문을 통해 이 책의 존재를 밝힌다. 음식연구가들의 관심이 폭발했고 1965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38호인 황혜성선생(조선왕조궁중음식 기능보유자, 2006년 타계)이 '음식디미방'을 확인하기 위해 영양으로 간다.

버스에서 한 학생에게 재령이씨 댁을 물었는데, 마침 그 학생이 13대 종손 이돈(당시 대학1학년)이었다. 그는 장계향선생의 제사를 지내려 고향으로 가던 중이었다. 이후 황혜성씨는 '음식디미방'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여러 권의 책과 논문을 쓴다.
장계향은 왜 자식을 다 키워놓은 뒤 이 책을 썼을까. 그녀에게 음식은 봉제사(奉祭祀, 제사를 모심)와 (接賓客, 소님을 대접함)이라는 가문경영의 '무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천부적인 학자 기질을 지닌 그녀로서 주먹구구식 '손맛'에 의지한 부엌의 노하우들을 체계화해놓고 싶었을 것이다.
▶ 양반가 부엌의 자부심과 맛이 살아있는 책
전체 146항목 중에서 술 만드는 법이 51항목이나 되는 것은 이것이 철저히 남성사회를 움직이는 음식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음식들이 지나치게 고급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당시 양반가의 사치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예식에 사용되는 식재(食材)의 정성을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
'안동장씨, 400년 명가를 만들다'(2010, 푸른역사)를 쓴 작가 김서령은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발견을 했다. <음식디미방>은 요리책이 아니라 여성이 도에 이르는 방법을 조목조목 기록해놓은 경전이라는 것이다...인간성의 바닥에 녹말처럼 가라앉아 있는 인(仁)이나 의(義)를 공들여 볕에 말리고 체에 쳐서 하얗게 드러내는 과정의 은유가 아닐 건가."
경북 영양의 양반가 깊숙한 곳에서 반백년에 걸친 요리 체험을 통해 만들어낸 대구껍질느르미를 가만히 씹으며 300여년 전 한 여인이 남기고간 깊은 풍미(風味)를 느껴보라.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원문보기

  • http://www.asiae.co.kr/article/2017050913592743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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