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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火요일에 읽는 전쟁사]화약을 처음 개발한 사람은 100살 넘긴 중국 의사?
글쓴이 tntv 등록일 [2020.07.21]

[火요일에 읽는 전쟁사]화약을 처음 개발한 사람은 100살 넘긴 중국 의사?

       
    
흑색화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흑색화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세계 전쟁사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꾼 물건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화약(火藥·Gunpowder)이 손꼽힌다. 창칼이 오가는 냉병기 시대가 끝나고 포탄이 오가는 화기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전쟁의 모든 양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 명성에 걸맞게 화약은 전쟁터를 숱하게 오간 명장이나 무기기술을 개발하던 장인의 발명품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화약을 개발한 이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에 매진하던 의원이었다.

손사막 초상(사진=위키피디아)

손사막 초상(사진=위키피디아)


최초로 화약을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중국에서 약왕(藥王)으로 숭배받는 전설적인 의원인 손사막(孫思邈)이란 인물이다. 그는 서기 6세기 말부터 7세기, 중국 수(隋)나라와 당(唐)나라 양대에 걸쳐 활약한 의원으로 '천금요방(千金要方)' 등 여러 저서를 남긴 인물이었으며 여러 약을 제조해 전수했다고 전해진다. 나이도 100세를 넘어 장수했으며 도교에서는 신선이 된 인물로 묘사된다.

의약개발과 함께 연금술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전통적으로 전해지던 불로장생약에 대해 연구하던 도중 황과 초석, 목탄을 섞어 세계 최초로 화약을 개발했다고 한다. 이 역시 환자에게 쓸 약으로 개발했기 때문에 화약이란 이름이 붙게 됐다. 화약은 실제로 그 후 오랫동안 약재로도 쓰였다. 중국 명(明)나라 때 약학서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따르면 "화약은 부스럼과 살충에 주효하며 습기와 온역을 제거하기도 한다"며 약으로 소개하고 있다.

중국 송나라 때 화약무기인 화창(火槍) 모습(사진=위키피디아)

중국 송나라 때 화약무기인 화창(火槍) 모습(사진=위키피디아)


이처럼 사람을 살리고자 만든 화약이 살상병기로 거듭난 것은 당나라 말기인 8세기 무렵부터라고 한다. 이후 11세기 중국 송(宋)나라 때부터 소형 로켓과 비슷한 무기인 화창(火槍), 화전(火箭)과 함께 대포가 무기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화약무기들은 13세기 몽골제국의 중국 정복 이후 제조기법이 중동을 비롯해 아시아 각지로 퍼지면서 더욱 발전하게 됐다.
 
우리나라에 처음 화약무기가 사용된 것이 언제인지는 불명확하다. 흔히 우리나라 화약의 아버지로 알려진 최무선(崔茂宣) 장군이 1377년 화통도감을 설치한 이후부터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그 이전에도 화약무기는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무선 장군이 화통도감을 설치하기 이전인 1373년, 고려조정에서 명나라에 화약을 요청해 다음해 5월 염초 50만근과 유황 10만근 등 화약물품이 수입됐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군의 주요 화약무기인 대장군전 발사 시연모습(사진=해군사관학교)

조선군의 주요 화약무기인 대장군전 발사 시연모습(사진=해군사관학교)


또한 화통도감 설치 이후 이듬해인 1378년에 화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대인 화통방사군이란 부대가 편성됐다. 이후 곧바로 화포를 설치한 함대가 편성되고 전술훈련에 돌입했으며 불과 2년 뒤인 1380년, 진포해전에서 이 화포 함대는 왜구 선박 500척을 전파시키는 큰 공을 세운다. 이렇게 빠른 부대편성과 실전배치, 전공 등을 고려하면 화약무기를 다루는 것 자체는 그 이전시대부터 오랫동안 진행돼왔음을 알 수 있다.

최 장군이 한국 최초의 화약무기를 만들고 운용했다는 증거는 희박하지만 최초로 화약의 국산화에 성공한 인물인 것에는 이견이 없다. 당시 중국에서는 화약제조법과 지도는 외부 유출을 엄금하는 금기품목이었다. 최 장군은 각고의 노력 끝에 중국의 화약장인 이원(李元)에게서 화약제조술을 배워 국산화에 성공했다.

하지만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어떻게 화약기술을 배우고 이를 활용해 무기를 제작했는지는 나와있지 않다. 최 장군이 직접 원나라로 건너가 화약제조술과 화포제조법을 빼내가지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대부분 국가에서 화약을 다루는 포병대 구성원에 대한 기록은 극비사항으로 규정돼있었고 대포를 다루던 포병 길드(Guild) 역시 아주 비밀스럽게 조직을 운영했던 것을 감안하면 최 장군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지 않은 것도 이런 연유가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지금으로 따지면 외국에 들어가 신무기 기술을 빼내 국산화에 성공한 국가 주요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때 국산화에 성공한 화약제조법과 화포제조법은 훗날 역사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의 전승 신화를 뒷받침한 것이 바로 이 화포의 위력이었던 것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원문보기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7011710150450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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