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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백악관 앞에 '구미위원부' 세운 이승만, 한국 독립안 美상원 표결 이끌어… 상하이서 日...
글쓴이 tntv 등록일 [2019.04.08]



백악관 앞에 '구미위원부' 세운 이승만, 한국 독립안 美상원

표결 이끌어… 상하이서 日帝 밀정 처단한 김구, 안창호에 버


금가는 실력자로 등장

  •  
입력 2019.03.26 03:21

[4월 11일, 임시정부 100년… 이승만·김구의 나라 만들기] [2] 대통령과 경무국장으로… 임시정부 수립 첫해 (1919~1920년)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 4월 23일 한성정부 집정관총재로 선임된 이승만은 9월 11일 통합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됐다. 김구는 8월 12일 경무국장으로 임명돼 임정 요인 보호, 일제 밀정을 처단하는 일에 헌신했다. 1919년 봄 이후부터 1920년 무렵까지 두 거인이 각각 대통령과 경무국장으로 활동한 시기를 되돌아본다.

1919~1920년 이승만·김구의 활동
미국 수도 워싱턴 DC 백악관 앞 라파예트 광장에서 스마트폰 지도 앱에 '1333 H Street NW'를 입력했다. 오른쪽 길로 약 350m, 걸어서 5분 걸린다는 정보가 떴다. '대한민국 특파 구미주찰위원부'가 있던 곳이다. 흔히 '구미위원부'라 부른다. 1919년 8월 25일 이승만은 '집정관총재(대통령) 포고문' 제2호를 내고 워싱턴 정가에서 가까운 이곳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했다. 김효선 건국이념보급회 사무총장이 고증해 주소를 알려줬다. 12층 건물 중 905호부터 907호까지 3개 사무실을 썼다. 1층에 '코시(cosi)'라는 레스토랑이 있다. 지난 1월 25일 찾아갔다.

이승만은 '포고문'에서 한성정부 직함인 '집정관총재'를 썼다.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기 전이었다. 영어로는 'President(프레지던트)'라 번역했다. 대한민국은 'Republic of Korea(리퍼블릭 오브 코리아)'였다. 9월 11일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뒤에도 영문 국호와 직함은 바뀌지 않았다. 100년 후인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름이다.

이승만은 6월 27일 국무장관과 상원의원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워싱턴 정계를 상대로 한국 독립을 촉구했다. 앞서 6월 18일에는 일왕에게 영문 공문을 보내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으며, 외교관을 제외한 모든 일본인을 한국에서 철수시키고 두 나라가 영원한 평화와 우호의 새 시대로 진입하자"고 제안했다. 이승만은 공문에서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의 '프레지던트'라고 적었다.

미 상원이 먼저 움직였다. 스펜서 상원의원은 6월 30일 미국과 한국이 맺은 조약(조미수호조약)에 따라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지 국무장관에게 상원 보고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냈다. 미 의회가 한국 문제를 정식으로 상정한 최초의 일이었다. 마침내 1920년 3월 17일 한국과 아일랜드 독립안이 상원에 상정됐다. 아일랜드는 38대36(기권 22)으로 가결됐지만, 한국은 안타깝게도 34대46(기권 16)으로 부결됐다.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갖는 미 의원들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라고 요청했다. 자신은 8개월에 걸쳐 여러 지방을 돌며 '한국 독립'을 요구하는 강연회를 열고 서재필이 만든 한국친우회 조직을 확대했다. 미국인으로 구성된 한국친우회 회원은 1921년 6월까지 21개 도시 2만5000명에 이르렀다.

이승만은 일제가 1910년에 팔았던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을 구입해 대한민국 공사관을 두려고 했다. 백악관 동북쪽 약 1.5㎞ 떨어진 로건 서클에 있는 3층 벽돌집이다. 하와이 교민들이 6000달러를 모았지만 집값엔 턱없이 못 미쳤다. 이승만이 사려 했던 공사관 건물은 93년 지나서야 대한민국으로 돌아온다. 2012년 10월 18일 문화재청이 350만달러를 주고 사들였다. 복원 공사를 통해 지난해 5월 22일 전시관으로 개관했다.

김구는 8월 1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에 취임했다. 임정은 상하이에서 청사를 몇 차례 옮겼다. 1919~1925년 사용한 청사는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사용한 마지막 청사가 유일하게 남았다. 1993년 고증·복원했다. 상하이 패션 거리인 신톈디(新天地)에 있다. 지하철 10호선 신톈디역 6번 출구에서 왼쪽 길로 200m 가면 한자로 '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舊址)'라 쓰인 건물이 나온다. 골목 입구 머릿돌에 '보경리(普慶里)'라고 옛 주소가 새겨져 있다. 지난달 27일 비가 쏟아지는데도 한국인 관광객 20여 명이 줄을 섰다.

김구는 임정 청사가 있는 프랑스 조계 지역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백범일지'에서 "상해에 있는 동안 프랑스 조계를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썼다. 일제 세력이 미치지 않는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위험이 없는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 국호를 제안한 신석우는 임정 수립 한 달 후인 5월 14일 프랑스 조계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됐다.

임정 요인을 보호하고 밀정을 처단하는 김구의 일은 임정 업무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임시정부의 내무행정이라면 밀정을 단속하는 경무국 일밖에 없었다"(이광수 '나의 고백')고 할 정도였다. 김구는 "경호원 20여 명을 임명해 이 일을 수행했다"고 했다. 김구는 과거 서대문감옥에서 활빈당 두목 '김진사'로부터 배운 배신자 처단법을 경호원들에게 전수했다. 5년간 경무국장으로 있으면서 밀정 30여 명을 처단했다. 1920년 1월 일제 경찰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김구를 안창호·이동휘에 버금가는 실력자로 꼽았다.

임정은 성립 때부터 여러 정파가 대립했다. 공산주의자인 통합임정 국무총리 이동휘는 정무회의에서 "나는 그 대통령(이승만) 밑에서 일 안 하겠다"고 고함을 질렀다. 신채호·박용만 등은 이승만을 반대하고 베이징으로 떠났다. 민족주의자 이동녕은 안창호에게 임정을 필리핀으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김구는 임정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 공산주의와는 선을 그었다. 어느 날 이동휘가 말했다. "적은이(아우)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떠하오?" "공산혁명을 하는데 제3국제당(코민테른) 의 지휘명령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오." 김구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독립운동이 어느 제3자의 지도 명령의 지배를 받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입니다.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씀을 하심이 옳지 못하니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 김구는 "이동휘는 불만스러운 낯빛으로 나와 헤어졌다"고 '백범일지'에 썼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26/201903260028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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