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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문화유산 답사기]호남 의병 전적지, 화순 쌍산의소를 찾아가다
글쓴이 tntv 등록일 [2019.03.05]
호남의병은 100여 년 전의 일이다. 의병 전적지 답사 중, 가장 아쉬운 점은 의병 수십만이 참여하고, 수만 의병이 희생된 거룩한 전투지에 견주면 마땅한 유적지가 없거나 있었던 유적지 조차 거의 소멸되었다는 사실이다. 의병장 생가는 흔적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고, 몇 남아 있는 곳조차 관리가 소홀하거나 개발로 그 원형을 잃고 있었다. 의병장의 무덤도 마찬가지였다. 의병 전적지에서는 지난날의 치열했던 전투지임을 알 수 있는 팻말조차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동행한 문화 해설사나 의병 후손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호남의병은 전설로만 남을 처지에 놓여 있었다. 01. 남한대토벌 작전에 항전한 호남항일의병장 ©독립기념관 02, 03. 화순 쌍산 항일의병 유적의 의병성. 높이 80cm 정도의 돌들이 돌담 모양으로 쌓여 있으며 그 내부에는 원형 또는 사각의 낮은 돌담들이 불규칙하게 늘어선 막사터가 모여 있다. ©문화재청

양회일의 병장이 맹활약한 장소

사실 나는 역사학도가 아니다. 뒤늦게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을 둘러보다가 거기서 내 고향 출신의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을 만났다. 나는 그때까지 내 고향 출신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만 알았지, 옆 마을의 구한말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선생과 그 어른 조카 항일명장 허형식 장군의 이름은 모른 채 살아왔다. 그 부끄러움으로 뒤늦게 국내외 항일 유적지를 십수년 째 순례하고 있다.

나는 먼저 호남벌에 창의의 깃발을 휘날렸던 의병전적지부터 답사에 나섰다. 그 가운데 양회일 의병장이 맹활약한 곳으로, 의병 전적지가 가장 잘 보존된 화순의 쌍산의소는 빠트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화순군청에 부탁하여 양 의병장 증손 양금렬 씨와 어렵게 전화연락이 닿았다. 여러 번 날짜를 조정한 끝에 2008년 4월 6일로 맞췄다. 나는 그 길에 전북 의병장 답사취재 계획도 세운 바, 그 전날 남원의 전해산 의병장 생가와 무덤을 답사한 뒤 다음날 화순 쌍산의소를 찾기로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출발 전, 양금렬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4월 5일은 한식날로 집안 어른들이 성묘하고자 모이기 때문에 하루 당겨줄 수 없느냐는 부탁이었다. 그래서 그날 오후 늦게 화순으로 가겠다고 일정을 바꿨다.

약속한 날 남원 전해산 의병장 유적지를 둘러본 뒤 부지런히 화순군 이양면에 도착하니 오후 6시가 넘었다. 양금렬 씨와 양동하(83) 전 능주 전교, 그리고 화순군 이순도 문화해설사 등 예닐곱 분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미처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우리 일행은 급히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눠 타고 쌍산의소로 향했다. 출발한 지 30여 분 후 마침내 쌍산의소 막사 터에 이르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하늘만 빠끔히 보이는 그곳은 이미 해가 넘어간 지 오래였다. 쌍산의소 막사 터에서 간신히 기념촬영을 마친 뒤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주 기막힌 천연 요새인 의병 전적지였다. 앞장선 이순도 씨는 그곳이 구한말 의병 요람지였고,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들의 은거지로도 쓰였다고 귀띔했다. 뒤따르던 양금렬 씨가 “지난해 여름(2007. 8. 3.), 이곳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지로 지정되었습니다.”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는 의병 전적지

조동걸 사학자는 구한말 의병전쟁 시기를 전기(1894~1896. 10), 중기(1904~1907), 후기(1907. 8~1909. 9. 10), 전환기(1909. 11~1915. 7), 말기(1915. 8~1918)로 나눴다. 이로 미루어볼 때 구한말 의병 투쟁기는 20여 년간이다. 의병전쟁에 참여한 의병의 수에 대체로 연인원 60만 명 내외요, 희생자 수는 15만 명 내외로 추산하고 있다. 그런데 막상 의병 전적지를 다녀보면 그때의 유물이나 유적은 거의 없었다. 순천대 홍영기 교수는 그 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물로는 화승총이나 진중일기 정도인데, 대부분 일제에 빼앗겨 전해지지 않습니다. 유적은 늘 일제에 쫓기는 의병들이 영구적인 시설을 새로이 만들기보다는 자연동굴이나 산성, 사찰, 재실 등 이미 지어진 건물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의병만의 독자적인 유적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남 화순 쌍산의소는 거의 완벽한 의병 유적지로 남아 있습니다.”

나는 이순도 씨에게 쌍산의소가 원형 그대로 여태 보존된 까닭을 물었다. “워낙 궁벽한 산중이라 외부와 단절되었기에 일제도 미처 파괴치 못하였습니다. 해방 뒤에는 호남이 상대적으로 덜 개발된 탓으로 이나마 보존되었을 겁니다.” 언젠가 나라에 민족정기가 바로 우뚝 선 그날이 오면, 이곳은 분명 민족의 성지로 새로이 발돋움할 것이다.

의병만의 독자적인 유적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남 화순 쌍산의소는 거의 완벽한 의병 전적지로 남아 있습니다.

의병대장 집안의 수난사

우리 일행은 쌍산의소 막사 터, 화약재료 창고였던 유황 굴, 제1~3 망루 등을 둘러보고, 최초의 거병 장소였던 증동으로 갔다. 어둠으로 그곳 대장간 터를 자세히 보지 못했다. 내가 못내 안타까워하자 뒤따르던 양금렬 씨가 말했다. “아쉬움이 많으면 다시 오게 되지요.” 우리 일행이 다시 출발지로 돌아오자 저녁 8시가 넘었다. 양 의병장 후손들은 갈 길 바쁜 나그네의 소매를 꼭 잡았다. 그 따뜻한 정에 그곳 한 밥집에 슬그머니 주저앉았다. 마침 때를 놓쳐 시장한데다가 그 고장 특미 육회비빔밥을 들자 그 맛이 일품이었다. 그제야 밝은 자리에서 주객은 소주잔을 나누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분들은 나의 신상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양동하 전능주 전교는 내 고향을 물었다. “구미 금오산인입니다.” “경상도 선비가 호남에 오시다니 참 귀한 손이오.” 양 전교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때(1906년) 우리 집안이 양 장군 거의로 가산을 탕진하여 그 뒤로는 힘을 못썼소. 그래서 자손들을 대학에도 못 보냈다오. 하긴 예로부터 나라가 망하면 충신 집안은 멸문을 당했다니 할 말이 없소만, 나라를 되찾았으면 집안이 다시 힘을 써야 할 건데, 어찌 그리 못하고 있소.” “ ‘왕대밭에 왕대난다’고 하지요. 앞으로 이 집안에서 큰 인물이 나올 겁니다.” “말씀 고맙소. 영남 분이 자기 고장 의병장보다 호남 의병장부터 먼저 찾아준 점도 고맙고. 내 생전에 언제 다시 찾아주시오.” 양 전교는 내 손을 잡고는 짧은 만남을 못내 아쉬워했다.

양금렬 씨에게 의병대장 집안의 종손으로 살아온 얘기를 물었다. “나라가 망했는데 어찌 항일의병 집안이 온전하였겠습니까? 한 마디로 풍비박산이 됐지요. 증조부 양회일 장군은 다행히 외아들(양원승)을 뒀는데, 바로 제 조부님이시지요. 왜놈에게 선친을 잃고 평생 떠돌다가 금강산에서 객사하셨습니다. 슬하에 세 아드님을 뒀는데, 두 아들도 아버지를 닮아 떠돌다가 큰 아들인 저희 아버지는 해방 후 60이 넘어서야 겨우 정착하여 저를 낳았습니다. 그때 동네에서는 환갑을 넘겨 생남했다고 잔치까지 벌였다고 하더군요. 막내아들, 곧 제 숙부는 끝내 출가하였습니다. 법명이 월인(月印)으로 몇 해 전에 입적하셨습니다.” 잠깐 들어도 파란만장한 집안의 수난사였다.

수저를 놓고 일어나자 그새 밤 9시였다. “언제 다시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남기고 먹빛 짙은 귀갓길을 재촉했다.

04. 화순 쌍산 항일의병 유적 내의 최초 결의 장소(복원 민가) ©문화재청 05. 화순 쌍산 항일의병 유적의 만세바위. 훈련 중 의병들이 이 바위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문화재청 06. 일본군에게 체포된 의병들 ©독립기념관

글. 박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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