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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장학량(1)54년 연금된 뒤에도 104세까지 장수한 비결
글쓴이 tntv 등록일 [2019.01.24]



우리나라에서 모택동과 등소평은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장학량(張學良, 1898-2001)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중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중국 현대사를 바꿔 놓은 ‘시안사변(西安事變)’의 주인공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죠. 장학량은 무려 104세까지 장수했는데, 특히 1936년말부터 1990년까지 무려 54년이나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연금생활을 겪고도 그렇게 장수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죠. 비결이 뭘까요?
장학량(왼쪽)과 장제스.
장학량(왼쪽)과 장제스.
장작림의 아들, 동북왕

장학량은 만주지방과 북중국 일부를 지배한 군벌 장작림(張作霖)의 맏아들입니다. 19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군대에 들어가 빠르게 승진을 거듭하여 1922년, 불과 25세의 나이에 아버지 휘하 부대의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청년원수’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장학량은 1928년에 장작림이 일본 관동군에 의해 폭사당한 뒤로 만주지역을 통치했는데, 그 때 붙은 별명이 ‘동북왕(東北王)’입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지배하기 위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장개석(蔣介石) 총통의 지시를 받아 부대를 이끌고 만리장성을 넘어 후퇴했습니다.

중국 현대사를 바꾸어 놓았다는 시안사변이란?

장학량이 국민당 정부의 동북군 부사령관으로 있었지만 공산당과의 동족상잔에 회의를 느끼는 것을 눈치 챈 장개석 총통이 공산당 토벌 독려차 서안에 내려왔다가 장학량에 의해 체포되어 감금당하게 됩니다. 감금된 장소가 바로 양귀비가 온천욕을 했던 ‘화청지(華淸池)’였죠. 장학량은 장개석을 협박하여 모택동의 공산당과의 전투를 중지하고 일본군에 맞서 통일전선을 형성하는데 동의하자 비로소 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이루어진 것인데, 이 사건이 바로 1936년의 ‘시안사변’입니다. 국민당 군대의 포위공격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던 공산당은 이 사건으로 기사회생하게 되었고, 결국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낼 수 있게 되었던 겁니다. 장학량이 아니었으면 모택동도 등소평도 지금의 중국도 없었을 가능성이 많지요.

54년 동안의 연금생활에서 풀리고도 10년을 더 살다

장개석총통과 함께 난징으로 돌아간 장학량은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10년 금고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특사를 받았으나 국민당을 따라 중국 각지로 끌려 다니다가 1949년 대만으로 쫓겨 갈 때 함께 끌려가 연금되었습니다. 국민당 정부는 장개석이 사망한 지 2년 후인 1977년에 연금 상태에서 풀어주었지만, 완전히 석방된 것은 장경국 총통이 사망한 후 1990년이었죠. 1993년에 국민당 정부로부터 거주이전의 자유를 허락받자, 1995년에 동생이 거주하는 하와이로 가서 정착했고, 2001년에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격동의 시대를 살았고 39세부터 93세까지 인생의 대부분을 연금된 상태로 자유가 없이 보냈지만 건강하게 장수한 데는 여러 가지 비결이 있지요.

남다른 특별한 인생을 오래 살다 간 장학량의 장수비결 첫 번째는?

오랜 연금 생활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간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의 마음상태가 평온을 유지했다는 것을 첫손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리가 인정되고 활달하며 낙관적이었다는 겁니다. 장학량은 진리를 추구하고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 자신의 행동이 정의로웠다는 확신이 있었죠. 그렇게 오래도록 연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낙관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기에 굳세게 생활해 나가 결국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가 말하기를 자신의 장수비결은 “그 어떤 것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을 마음속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죠. 사실 장개석 총통은 장학량을 당장 죽이고 싶도록 미웠겠지만 죽여 버리는 것보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도록 두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오히려 장학량은 유유자적하며 잘 살았다고 봐야겠죠. 물론 장개석과 장학량은 시안사변 전까지는 상관과 부하 관계이면서 의형제이기도 했습니다. 둘은 열세 살 차이였는데, 장학량은 장개석에 대해 “나에게는 아버지와 같았다”고 말하곤 했답니다.

54년 연금생활을 꿋꿋하게 버틴 생활습관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음식에도 절도가 있었습니다. 한의학에서 가장 오래된 원전인 황제내경(黃帝內經)에 나오는 백세가 넘게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기거유상 음식유절(起居有常 飮食有節)’입니다. 또 하나가 ‘불망작로(不忘作勞)’인데,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리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일이나 성생활, 오락, 운동 등을 지나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장학량은 당연히 불망작로했다고 봐야겠죠. 연금되어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무리할 게 뭐가 있을까요? 장학량은 매일 6시에 기상하여 제때에 구보하고 제때에 산보하고 제때에 아침식사를 하고 제때에 독서하고 공부했습니다. 정해진 시간표대로 생활했던 것이죠. 오후에는 낮잠을 자고, 밤에는 TV나 경극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음식은 청담하게 채소와 잡곡을 위주로 먹었지만 영양을 확보하였고 비위장의 기능을 정상으로 유지하였습니다.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면서 소화 흡수가 잘 되었다는 것이니 건강을 잘 지켜나갔던 겁니다.(계속)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5/28/201505280128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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