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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집단지성의 대표적 산물, 유교책판 VS 위키피디아
글쓴이 tntv 등록일 [2018.12.04]
“집집마다 백과사전이 있던 때가 있었다. 당시에는 5년이고 10년이고 책장에 모셔둔 백과사전을 뒤적여 필요한 정보를 찾곤 했다. 정보화시대로의 급변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전혀 새로운 형태의 백과사전을 등장케 했다. 누구든지 지식과 정보를 직접 올릴 수 있으며 기존에 등록된 지식정보를 수정·보완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다. 위키피디아는 지식을 생산해 내는 주체가 특정한 개인 전문가에 한정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수록 지식은 확대 재생산 되어 그 지식의 영역을 넓혀 간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개개인이 만들어 낸 퍼즐은 개인 전문가가 결코 만들 수 없는 거대 지식을 형성했고, 이 지식은 계속해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 유학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측면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01. 겸재 정선의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유림들은 도산서원에서 『번암집』을 발간하였다.     ⓒ간송미술문화재단 02. 누구든지 지식과 정보를 직접 올릴 수 있으며 기존에 등록된 지식정보를 수정·보완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 ⓒ이미지투데이

문집발간의 몇몇 사례들

1756년 음력 11월 21일,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이 남긴 일기를 보면, 영남 출신인 정옥(鄭玉, 1694~1760)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당시 정옥은 좌부승지에서 당상관인 종3품 승정원 승지 승진을 앞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영해부사를 자처하여 왕이 허락했다는 것이다. 정옥이 개인의 출세를 멀리하고 영해부사를 자처했던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지게 되는데, 바로 그의 5대조인 정탁(鄭琢, 1526~1605)의 문집 발간 때문이었다. 당시까지 정탁의 문집이 발간되지 않고 있었는데, 그의 사후 약 150여 년이 흐른 후 유림들이 공의를 모아 그의 문집을 발간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정옥은 문집 발간에 힘을 보태기 위해 판목을 구하기 용이한 영해부사를 자처했다. 조상 문집 발간을 위해 개인의 출세마저 버렸던 것이다.

1823년 음력 10월 20일 도산서원에서는 지역 유림들이 참여하는 도회가 열렸다. 이 도회에서는 정조 임금 때 영남 남인을 대표하여 정승까지 올랐던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문집인 『번암집』 발간을 결정했다. 채제공사후 24년 만에 그는 영남을 대표했던 인물로 인정받았고, 영남유림 전체는 힘을 합하여 『번암집』을 발간하기로 했던 것이다. 업무를 추진할 도도감(都都監) 2명과 도감, 교정, 유사 등의 임원을 선출하고, 비용에 관련된 문제도 논의했다. 1,167장의 목판을 판각해야 하는 거대한 사업이기 때문에 비용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 때문에 이 도회에서는 병산서원과 호계서원을 중심으로 대치하고 있었던 병호시비마저 덮고, 모두 힘을 합쳐 『번암집』을 발간하기로 결정하였다. 영남 유림 전체가 채제공의 문집 발간에 힘을 모으기로 했던 것이다.


문집 발간의 역사(役事)

현대 출판 시스템의 관점에서 보면, 정옥의 지방관 자처나 『번암집』 발간을 위한 영남 사림들의 고민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 문집 간행 과정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엄청난 역사(役事)였기 때문이다. 문집을 발간하기 위한 인쇄용 판목을 만들고 이를 판각한 후 종이에 인쇄하여 책을 만드는 과정에 필요한 예산은 한 집안이나 문중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당시 문집을 간행하는 과정에 대한 일기 기록들이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경비조달’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번암집』 목판을 판각하고 책을 찍는 과정에서도 영남지역 전 서원과 향교에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는 등 예산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 부단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목판 판각과 문집 발간의 과정을 기록한 <간역시 일기>들을 보면 목판 판각에 얼마나 많은 예산이 들었는지 확인 가능하다. 물론 현재 경제 사정과 조선시대 경제 사정을 정확하게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당시 쌀값을 지금 쌀값으로 단순 환산해도 그 비용의 대략은 짐작 가능하다. 보통 책판 1장은 앞뒷면으로 판각되어 있는데, 그 한 면은 2쪽을 인쇄하도록 되어 있다. 목판 1장이면 4쪽 분량을 찍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책판 1장을 판각하기 위해서는 대략 200만 원에서 400만 원 정도의 예산이 소요되었다. 고서 한 책이 일반적으로 80쪽 분량인 점을 감안하면, 한 책을 찍기 위해 4천만 원에서 8천만 원 정도가 소요되었던 것이다. 1,167장의 목판을 판각해야 했던 『번암집』 같은 경우, 1장당 200만 원 들었다고 가정해도 23억 정도가 드는 대역사였다. 특히 조선시대 경제사정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23억 정도가 주는 당시의 체감물가는 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출간 비용을 한 개인이나 문중이 감당할 수 없는 이유였으며, 이 때문에 출간 비용은 이를 결정했던 공동체가 안아야 했다. 그래서 지역 공동체 전체가 출간비용을 마련하여 문집을 출간하는 ‘공동출판’의 형식을 띠었던 것이다.

03. 유교책판은 조선시대(1392~1910)에 718종의 서책을 간행하기 위해 판각한 책판으로, 305개 문중과 서원에서 기탁한 총 64,226장으로 되어 있다. ⓒ유네스코 04. 『번암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채제공의 시문집으로, 영남 유림 전체가 힘을 모아 발간했다. ⓒ두피디아 05. 유교책판은 유교가 만들어 낸 다양한 실천과 삶의 형태에 대한 거대한 기록이며, 성인됨을 지향했던 사람들이 남긴 구체적 삶의 증거들이다. ⓒ유네스코 06. 실시간 번역서비스 플리토는 120만 명의 집단지성 번역가 및 3천 명 이상의 전문번역가들이 번역 요청에 대한 답변을 제공하는 통합 번역 플랫폼이다. ⓒ플리토

공론과 집단지성

공동체가 함께 경비를 조달하여 책을 출간하는 ‘공동출판’이 성공하려면 출간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가 필수적이다. 문집 출간이 결정되면 그에 대한 비용과 노력을 함께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공동체 전체가 반드시 ‘출간의 이유’에 대해 동의해야 했다. 명분과 이유가 분명하면 참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문집 발간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문집 출간에 비용을 대고 자발적으로 참여했었을까?

조선은 유교를 국교로 해서 만들어진 나라였다. 유교가 지향하는 인간형과 이들을 중심으로 한 도덕공동체에 대한 이상이 분명했다. 국가는 도덕적으로 완성된 ‘성인’이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왕도정치(王道 政治)를 꿈꾸었다. 이 때문에 조선은 완성된 인간형인 ‘성인’을 지향했고, 이를 중시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유교 사회가 문화적으로 유지되고 전승되려면 따라 배울 수 있는 ‘성인’을 표상으로 제시해 줄 필요가 있다. ‘성인’을 인정해 주는 사회적 메커니즘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인’을 인정해 주는 메커니즘은 두 가지 정도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그 사람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메모리얼 기능’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가 남긴 말씀을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일이다. 전자가 주로 서원 배향과 불천위 제례를 통해 이루어졌다면, 후자는 성인으로 인정된 분의 말씀을 문집으로 발간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모두가 본받아야 할 표상으로서 공동체가 인정한 사람이 남긴 기록을 문집으로 발간하여 전승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인정의 단계 는 ‘공론(公論)’이라는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문집 제작은 사적인 성과 기록 차원을 넘어서 선현의 학문적 당위성을 평가하는 일련의 과정이 되었다. 가문, 학맥, 지역사회 등으로 연결된 공론 참여자들이 인정한 내용만이 문집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공론’이 지향하는 내용은 분명했다. 유학에서 말하는 도덕적 인간의 완성을 의미하며, 그러한 기록들을 문집으로 발간하여 후대에 전하려 했다. 성인으로 평가되는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성인’으로 살았던 사람의 다양한 삶의 태도와 구체적인 실천을 남겼던 것이다. 유교가 지향하는 이념적 지향성을 향한 다양한 실천과 수양, 삶의 영역들이 기록으로 남게 된 이유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실천과 삶의 다양한 퍼즐들이 유교가 지향하는 이념적 지향성을 향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유교책판은 유교가 만들어낸 다양한 실천과 삶의 형태에 대한 거대한 기록이며, 성인됨을 지향했던 사람들이 남긴 구체적 삶의 증거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교책판이 단일 지향성을 향한 거대한 집단 지성의 산물로 규정하는 이유이다. 2015년 10월 유네스코는 이러한 점을 인정하여 ‘유교책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정탁 鄭琢 조선 중기 문신인 정탁은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이조좌랑·응교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곽재우 등 명장을 발탁했다.

글. 이상호(한국국학진흥원 기록유산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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