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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KBS 방송 다시보기]'월미도의 두 얼굴'
글쓴이 tntv 등록일 [2015.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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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10일 월미도에 무슨 일이 있었나


       






월미도 미군폭격사건 등 월미도 역사 다룬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 출간

인천 중구 월미공원에서 열린 '월미도 미군 폭격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에서 행사 후반부에 희생자의 넋을 달래는 진혼굿이 진행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매년 9월15일 인천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기념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열린다.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흐름을 바꾼 작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인천상륙작전이 가족과 친구를 잃고 고향을 떠나게 된 상처로 남아있다.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한 인천 월미도 주민들의 이야기다.

강변구씨가 쓴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서해문집 펴냄)는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한 월미도에 숨은 아픈 역사를 되짚는 책이다.

인천상륙작전 5일 전인 1950년 9월10일. 미군 해병대 전폭기 네 대가 월미도 상공에 나타났다. 전폭기들은 아침 7시부터 낮 12시까지 120가구 600여명이 살고 있던 민간인 거주지역에 네이팜탄 95발을 투하했다. 이 일로 주민 100여명이 숨졌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월미도를 떠났다. 왜 미군은 남한의 민간인에게 폭탄을 투하했을까.

   

책은 미군이 민간인 마을의 존재를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폭격 했다고 설명한다. 당시 월미도에 주둔하는 인민군의 규모를 정확히 알지 못했던 미군이 월미도 민가에 적의 병력이나 무기가 숨겨져 있을 수 있다고 보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불확실성 제거 차원에서 폭격을 감행했다는 것.

어쩔 수 없이 마을을 떠났던 월미도 원주민들은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시도를 계속 해왔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월미도의 관리권이 미군 기지에서 다시 한국 해군기지로, 인천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월미도 원주민들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2008년 2월 진실화해위원회는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에 대해 58년 만에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고 월미도 원주민들의 귀향과 위령사업 진행, 명예회복 조치 강구 등을 정부에 권고했다. 그러나 여전히 별다른 조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출판사에서 어린이 역사책을 만들어왔던 저자는 어느 날 우연히 읽은 월미도 관련 신문기사를 보고 월미도의 역사에 관심을 두게 됐다. 그는 이제는 80대가 된 원주민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역사를 파고들어 '그날'을 재구성했다.

저자는 "월미도 주민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희생'됐다기보다는 폭격으로 인해 '학살'됐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어 대한민국을 구한 인천상륙작전이 민간인학살이라는 '전쟁 범죄'에 크게 빚지고 있다며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동료시민으로서 이 일에 관심을 둘 것을 촉구한다. 296쪽. 1만3천900원.

zitrone@yna.co.kr








한국전쟁으로 미군이 월미공원 일원에 주둔하면서, 월미도 원주민들은 자기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인근 소금창고에서 임시거주하면서 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군 헌병이 입구에서 총을 들고 서 있는데, 들어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원주민들은 말했다.
 
1971년 월미도에 주둔한 미군이 철수하자, 1972년 우리나라 해군이 소유지를 강제 징발해 국방부로 소유권 보존 등기를 했다. 원주민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루어진 조치였다.
 
   
 
그리고 2001년 인천시가 국방부에서 토지를 매입하는 동안에도 인천시는 월미도 원주민들과 한 번도 협의 없이 매매계약을 체결한 뒤 월미전통공원으로 조성했다. 



┏┛ ♡♡♡♡♡♡♡┗┓
┃ 너무 억울한 사람들
┗ ━ ━ ━ ━━━ ━━┛

'* ♥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은 위기일발의 대한민국을
구출한 전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특히 군사 전문가
모두가 5천분의 1에 가까운 모험이라고 반대했던 작전이었으니까요. 

 

* ♡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월미도에 대한 십여일에 사전 폭격으로
월미도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무수하게 비명횡사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피난을 갔으나 지금까지 고향인 월미도에 돌아가지 못 하고 있습니다.

 

▶ㅣ◀ 상륙작전 직후엔 미군이 진주하여 출입을 통제했고,
미군이 철수한 뒤
해군 제2함대가 또다시 원주민 출입을 막았습니다.
국방부는 원주민들이
거주했던 땅을 귀속재산처리법을 이용하여 국유화 한 후
2001년 인천시에 거액을 받고 팔았습니다.
인천시는 이 곳에 월미공원을 조성하여 원주민들은 64년 동안 고향인
월미도에
돌아가지 못 한채 지금도 유랑생활을 계속 중인 가장 억울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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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월미도 원주민을 테마로 한 다큐멘터리

'월미도의 두 얼굴'이 1월 30일(금요일) 오후 2시 KBS 1 TV

'열린채널'을 통해 방송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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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의 두 얼굴'을 다시 보기 원하시면


왼쪽 상단의 VJ 金鐘文을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2014년09월16일 00시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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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실향민 미군폭격 64년”통곡”위령제

 

[여성종합뉴스/김종석기자]  인천시 중구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회는 15일  월미공원에서  문병호의원 중구 구의원 이정재"김철홍"김영훈"등이 참석한가운데  '미군 폭격(64주기)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를 열었다

이어 추모사에서  문병호 의원는 "민간인 희생자 들을 지원하는데 국방부와 인천시는  서로 떠넘기기 한다고  말하면서.월미도 폭격으로 희생된 원주민들의 특별법이 하루빨리 통과돼야 한다"며 이어" 2012년 9월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희생자와 그 유족 등 피해자에 대한 보상안을 담은 특별법을 발의했으나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라"고 .말했다

 

한편 월미도원주민귀향대책위원회 한인덕(69) 위원장은 인천 상륙작전 승전의 이면에는 월미도 민간인 희생이라는 어두운 그늘 아래 가려저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이 보상과 귀향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또한 한국민간인 피해학살 유족회 대표 박우영 의장은 월미도 원주민들의 월미도 사건은 한국전쟁의 전사를 뒤바꾸는 역사적 큰 사건이 되었지만 여기 계시는 유족들에게는 크나 큰 아픔이 되고 말앗습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국가의 폭력에 의해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점에서는 다른 과거사 사건과 유사하지만 국가가 아무런 접합한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민간인들을 토지등을 빼앗고 해당 토지를 매각해 금전적 이익까지 편취했다는 점에서는 큰 차별성을 가집니다.

이 월미도 사건은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9월 10일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북한군에 대한 무력화 작전을 전개하면서 월미도의 민간인 마을을 폭격해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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