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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안중근 의사 유서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단호한 편지
글쓴이 tntv 등록일 [2012.11.01]


<안중근 의사 유서>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고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이등박문 저격 당시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ATj0AkToSVo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여순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일제의 무도한 재판은 겨우 6회 개정으로 이등박문을 응징한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동지 우덕순,조도선,유동하 등에게도 징역형이 언도되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는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반문하면서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보였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나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는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그래서 의사는
공소를 포기한 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그에 따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31세로

뤼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안중근의사께서  갇히셨던 감방앞에 있는 설명문>

 

<안중근 의사 께서 갇히셨던 감옥의 창문>

         <죄수들을 사형시켰던 교수대> 

              ( 당시 안중근 의사 께서도 이곳에서 돌아가신듯 ....)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날부터 약 2개월 후-
3월 26일 오전 9시께  안중근 의사는 전날 고향으로부터 보내온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형장으로 나아가기 전에 약 10분간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사형집행 직전 마지막 유언을 묻는 검찰관에게 "나의 거사는 동양 평화를 위해 결행한
것이므로 임형관리들도 한일간에 화합하여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한뒤
'동양평화만세'를 부르려 했으나 제지당했다.
오전 10시, 안중근 의사는 의연한 자세로 순국했다.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문명이 높던 성균진사 안태훈과 백천조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안중근 의사는 32살에 순국했다.
 
비록 젊은 나이에 호국의 영령이 되었으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수많은 선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민족정기의 발양자였다.

 

안의사가 순국하기 1년전- 1909년 3월 5일경,
11명의 동지와 함께 왼손 무명지를 끊어 그 피로'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며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조국의 독립회복과 동양평화를
위해 몸바칠 것을 다짐했다.
 
1910년,  안중근 의사가 일제로부터 사형을 언도 받은 2월 14일,
이 뜻깊은 날,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일본 상인들의 간교한 상술이 원동력이 된

 발렌타인데이로 들떠 있어서야 되겠는가?

 

 

<의거 직후 중국 뤼순 감옥의 안중근 의사(왼쪽).>

의거 다음날 1909년 10월27일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서 찍은 안 의사 부인 김아려 여사와 아들 분도, 준생(오른쪽 위).

안 의사의 둘째 아들 준생, 동생 정근, 정근의 아들 원생, 안의사의 딸 현생, 동생 공근의 아들 우생.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제공>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3의사 묘역과 안중근 의사 가묘(맨 왼쪽) / 효창공원>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형된 그날 밤 한 일본 간수가 그의 시신을 뤼순 감옥 터 뒤에 황급히 매장했다고 한다. 이후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는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찾아 국내에 봉환하기로 한다. 이듬해 6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세 분의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지만 안중근 의사를 위해서는 네 번째 '허묘'를 만든다. 이것은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1949년 김구 역시 안두희의 암살로 사망하고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위치 또한
찾지 못했다.


 



2월 14일 속칭 발렌타인데이는 안중근 의사께서 사용 선고 받은 날,
발렌타인데이의 초콜릿 풍습은 일본의 한 제과점에서 유행시킨 교묘한 상술에서 비롯,

 

일본은 '독도(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고 거국적인 '독도(다케시마)의 날'행사를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발렌타인데이  
초콜릿 물결이 부끄럽기만,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직후 정황 묘사한 러시아 신문 발견

  • 김성현 기자

    입력 : 2015.02.04 21:30 | 수정 : 2015.02.05 00:59

    "러 장군, 네발로 기어 도망가"

    
	안중근 의사 사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를 수행하던 인물들은 깜짝 놀라서 멀지 않은 곳으로 피했다. 러시아와 일본의 수행원들은 정신이 나가 도망쳤으며, 어느 러시아 장군은 네 발로 기어가면서 겁먹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중근(安重根·1879~1910·사진)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驛)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의거(義擧) 직후의 정황을 묘사한 러시아 신문이 발견됐다. 이태진 한국역사연구원장(서울대 명예교수)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보도한 1911년 10월 24일자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신문 기사를 러시아 기사 아카이브에서 찾았다"고 4일 밝혔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이토와 수행원 3명을 권총으로 저격하고 "코레아 우라(한국 만세)"를 외친 뒤,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됐다. 이 기사는 저격 직후의 정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당시 블라디미르 코콥초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안 의사의 의거 직후 "눈앞에서 일어난 사고에 당황하지 않고 쓰러진 이토 공작(公爵)을 부축했으며 공작은 그의 품에 쓰러졌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코콥초프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회담을 갖기로 했던 당사자다.

    이 신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맞이하는 환영식을 필름에 담기 위해 하얼빈역에 갔던 러시아 촬영 기사가 카메라를 작동시킨 덕분에 총격 순간도 촬영할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종현(서울대 노어노문학과 박사과정)씨가 번역한 러시아 연해주국립박물관의 연구 논문에 따르면, 이 영상은 '하얼빈 최초의 영화 촬영'이기도 했다.

    당시 이 영상의 판권을 소유한 러시아 상영업자는 하얼빈 영화관에서 이 필름을 상영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당국이 상영 금지 처분을 내렸다는 사실도 이 기사를 통해 확인됐다. 이 때문에 러시아 상영업자는 프랑스 기업가에게 당시 1만5000프랑에 영상을 판매했다. 이 신문은 "이후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이 필름을 상영했다"고 전했다. 현재 필름은 미국이나 프랑스 등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2009년 영상 일부가 KBS TV '역사 스페셜'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출처: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2/04/2015020404250.html?news_Hea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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