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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윤봉길 의사의 유서(보물 제568호)를 읽으면 조국이 보인다.
글쓴이 tntv 등록일 [2012.02.24]

 

 윤봉길 의사는 상해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32. 12.19  아침 7시40분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셨다.

     당시 윤 의사 나이 25세였다.<총탄이 이마를 관통했다>



윤봉길 의사 순국 직후 일본군 군의관이 작성한 사.체.검.안서 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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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애국단 입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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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윤봉길 의사의 유서-보물 제568호로 지정>

 

                                                             <선서문>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청년제군에게>

피 끊는 청년제군들은 아는가 모르는가.

무궁화 삼천리 내 강산에

왜놈이 왜 와서 왜 광분하는가.

피 끊는 청년제군들은 모르는가.

되놈이 되와서 되가는데

왜놈은 와서 왜 아니가나.

피 끊는 청년제군들은 잠자는가.

동천에 여명은 밝아지려 하는데

조용한 아침이나 광풍이 일어날 듯

피 끊는 청년 제군들아 준비하세.

군복 입고 총 메고 칼 들면서

군악 나팔에 발맞추어 행진하세.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아들에게 남긴 유서)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없음을 슬퍼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살고 싶은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나만 나혼자만 잘먹고 잘살다 죽을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와 내가족의 미래보다 조국을 선택했습니다.
 백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들 계십시오."

- 윤봉길 의사 유서 中 -

 

 

<홍커우공원의 단상> 

 

윤봉길 의사는 역사적 의거일인 1932년 4월 29일 일찍 교포 김해산(金海山)의 집에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김구(金九) 단장과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그는 식사가 끝난 후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 1개와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 1개를 김구 단장으로부터 받아
하나는 어깨에 메고 하나는 손에 들었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는 자기가 찬 새 시계와 김구 선생이 찬 헌 시계를 바꾸어 갖고,
사용하고 남은 의거 준비금을 김구 단장에게 돌려주었다.

그 후 그는 김구 단장의 전송을 받으며 택시를 타고 홍커우공원으로 갔다.
차에서 내려 수통으로 위장된 것은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으로 걸고, 도시락으로 위장된 것은
오른손에 들고 홍커우공원 정문을 들어서면서 중국인 문지기에게 일본인이라고 응대하며
통과하였다.
오전 7시 50분경 공원 안으로 들어가 미리 정해 두었던 지점에 이르러 폭탄을 투척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홍커우공원 안에는 상해거주 일본인이 1만 명, 상해 침략 일본군이 1만 명,
그밖에 각국 사절, 각계 초청자 등을 합하면 2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그들은 중앙의 높은 식단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전면에 일본관민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고,
그 앞에는 일본 학생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열병행사에도 참가할 일본 육해군의 군대가 정예무장을 하고 도열해 있었다.
식단 뒷면에는 기마 헌병이 단 밑으로 단상을 호위할 뿐 아니라, 그 뒤 수 미터의 간격을 두고
경비병력이 이중 삼중으로 삼엄하게 경계하고 그 뒤에 일반 군중이 회집해 있었다.

높고 넓은 단상 위에는 도륙 표적물인 일제 침략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과 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이 중앙에 자리 잡았고, 
 그 좌우로 일제 제 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주중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 민단간부 토모노(友野盛) 등
 7명의 상해사변의 원흉들이 천주(天誅)를 기다리며 착석해 있었다.

윤봉길 의사는 미리 작정했던 후편 오른쪽 군중 속으로 들어가 투척 장소와 시간을 맞추어
의거의 최후 준비를 하였다.
오전 11시 20분경 그들 축하식의 제 1차 순서인 관병식(觀兵式)을 끝내고 이어 제 2차 순서인
축하식순(祝賀式順)으로 들어가 일본국가가 제창되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드디어 역사적인 11시 50분경,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으로 된 자살용 폭탄을 땅에 내려놓고
어깨에 걸메고 있던 수통 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가죽끈이 붙은 그대로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빼면서 앞사람을 헤치고 2미터 가량 전진하여 17미터 내외 떨어진 중앙 단상 위로
힘껏 투척하였다.
그 폭탄이 그대로 노무라(野村吉三郞)와 시게미쓰(重光葵) 면전에 명중하면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변하였다.

결국 상해침략의 원흉인 총사령관 육군대장 시라카와(白川義則)는 전신에 24개처의 탄편을 맞아
신음하다 5월 24일 사망하고, 해군총사령관인 제3함대 사령관인 해군중장 노무라(野村吉三郞)는
실명하였으며 제9사단장 육군중장 우에다(植田謙吉)는 다리를 절단하였다. 그리고 주중공사 시
게미쓰(重光葵)는 다리가 부러져 절뚝발이가 되었고 거
류민단장이며 상해사변의 민간 원흉인 카와바다(河端貞次)는 창자가 끊어져 즉사하였다.
이밖에도 단상에 있던 주중 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와 민단간부 토모노(友野盛)도 각기 부상하여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의탄을 맞았다.

윤봉길 의사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땅에 잠시 내려놓았던 자폭용 도시락 폭탄을 들어올려 안전핀을
뽑으려는 순간, 부근 경비를 맡았던 일제군경의 제지를 받았고 군중과 그들로부터 즉석에서
포위당해 집중구타당하는 바람에 혼도하고 말았다.

의거 현장에서 윤봉길 의사를 포박한 일제 군경은 윤봉길 의사를 전시 군법회의 대상자로
상해(上海) 일본군 사령부 수금소(囚禁所)에 감금하고 혹독한 고문과 냉혹한 심문을 통해 의거
전말과 그 배후를 추궁하였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는 한인애국단 김구 단장이 그 해 5월 10일 ‘홍구공원작탄진상’이란
성명서를 통해 그 진상을 세상에 공포할 때까지 일체 배후와 사건 경위를 함구하였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는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때 윤봉길 의사는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고 떳떳이 주장했다.

사형이 확정된 후 윤봉길 의사의 유서가 나돌자 헌병대에서 다시 윤봉길 의사를 호출했다. 그
 자리에서 윤봉길 의사는 자신이 쓴 유서를 확인해 주며 “현재는 우리나라가 힘이 약하지만
세계 대세에 의해 반드시 우리는 독립한다. 일본은 지금 열강이지만
시든 나뭇잎같이 항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
윤 의사가 떠나기 직전 말했다. “선생님, 제 시계와 바꿉시다. 제 것은 어제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한 시간 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
시계를 맞바꾼 백범은 목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라고 인사한다.

 

윤봉길의사는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15분 헌병의 호위 아래 형장에 도착했다.
도착할 당시 윤의사는 체포될 때 왼손에 들고 있던 중절모자를 눌러 쓰고 그때의 양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윤봉길 의사 처형직전 모습      © 편집부
이런 차림새는 신문기자 등 사람들의 눈에 띠지 않게 하려는 특별조치였다.
 
형장은 이시카와현(石川縣) 이시카와군 아자 미고우시(三小牛) 지역내 가나자와 육군 작업장의 서북쪽 골짜기로, 이곳에는 깎아 세운 듯한 언덕이 약 7m의 높이로 솟아 있어 사격에 적합한 장소였다.
 
일제는 같은 날 새벽 그 언덕 3m앞 지점에 십자가 모양의 형틀을 설치하는 등 형장설비를 끝냈다.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로부터 ‘사형집행은 절대 비밀로 시행하라’는 명령(육밀 제489호)을 받은 제9사단장은 형장으로 가는 길가 요소요소에 헌병을 배치하고 형장은 보병소대가 그 주변을 에워싸고 철통 경계를 했다.
 
특히 형장에는 소수의 집행관계자만 입장이 허가되고 그 누구도 접근을 금지했다.
군의관 세가와 요시오(瀨川吉雄)로부터 윤의사의 심신(心身)에 이상이 없음을 보고 받은
검찰관 네모토 소타로(根本莊太朗)는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언도된 사형을 집행한다고 통고하며 유언을 물었다.
 
 
이에 윤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사형은 이미 각오한 것이니 지금에 임하여 아무 것도
해야 할 말이 없다’고 일본어로 명료히 말했다. 간수들은 윤의사를 형틀 앞 가마니 위에
꿇어앉힌 다음 양손을 형틀에 두 마디씩 묶고 헝겊으로 눈을 가렸다.
 
사수 2명이 전방 10m 앞에서 엎드려쏴 자세로 검찰관의 사격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윤의사는 갑자기 무언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우리말로 읊조렸기 때문에 집행자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마도 의거 2일전 두 아들에게 남긴 자필유서(국가보물 제568호)의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육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데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 ’ 탕! 7시 27분 정사수가 쏜 1발이 양 눈썹 사이에
명중했고 7시 40분 군의관이 절명을 확인했다.
 
사형집행은 보복적 차원에서 윤의사의 의거로 죽은 상해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白川) 대장의 사망시간에 맞춰 실행했다. 일제는 무릎을 꿇어앉힌 채
처형함으로써 기개를 꺾으려 했지만 윤의사는 미소 띤 얼굴로 ‘무슨 말을 더하겠느냐’ 며
최후까지 의연했다.
 
형장에서 집행과정을 기록한 녹사(錄事) 다치무라 규베(立村久兵衛)는 ‘범인은 말이 명료하고
미소를 짓는 등 담력이 극히 굳세고 침착했다’고 윤의사의 태도를 ‘사형집행시말서’에
기술하여 육군대신에게 보고했다.
 
일본군은 사체를 가나자와시 노다산(野田山) 공동묘지 서쪽 쓰레기하치장의 모퉁이에
평평하게 극비리 암매장하고, 해방 후 재일동포들이 유해를 발굴할 때까지 약 13년간
사체를 짓밟고 다니는 반인륜적 만행을 저질렀다. 

 
1946년 유해를 봉환하여 7월 7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모셨다. 윤의사의 육신은
비록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짧은 일생을 마감했지만 숭고한 애국혼은 천추에 빛날 것이고,
혈육으론 종(淙)과 담(談) 두 형제를 두었으나 민족정기의 후계자는 만대에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국가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은 윤의사의 유언을 가슴 깊이 되새기며 꿈을 위해 도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윤주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연구위원

 




 


<백범 김구 선생(왼쪽)이 윤봉길 의사 사후인 1946년 4월 26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윤봉길 의사 생가를
    방문했을 때의 모습. 왼쪽부터 백범 선생, 윤 의사의 부친인 윤황, 모친인 김원상, 부인인 배용순, 아들인 윤종 씨.>



윤봉길의사가 처형되기직전 묵어두었던 형틀-

가로축은 사라졌고 이렇게 세로축만을 보관하고 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 소장>

농민독본 보물568-10호

소 재 지; 충남 예산군  (충의사)



윤봉길(尹奉吉)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태어나, 덕산보통학교와 오치서숙에서 공부하였고 19세 때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20세 때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했으며, 22세 때 월진회를 조직, 농촌운동을 정열적으로 전개하였다.

윤봉길 의사 야학교재 농민독본 '한글편'

 
윤봉길의사 유품 [尹奉吉義士遺品]
요약
독립운동가 윤봉길의 유품들.
지정종목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8호
지정일 1972년 08월 16일
소장 장서각, 윤종, 윤남의
소재지 충남 예산군 외
시대 일제강점기
종류/분류 유품
크기 13종 68점
 
 
본문
보물 제568호. 13종 68점. ① 선서문 1매:1932년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자필로 쓴 선서문. ② 윤봉길의 이력서 및 유서 각 1매: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의 이력서 및 유서. ③ 회중시계 1개:상하이[] 훙커우공원[]으로 거사를 위해 떠나는 날 김구()의 낡은 시계와 바꾸어 찬 것. ④ 지갑과 중국화폐(지갑 1개, 화폐 10개):훙커우공원 거사 때 갖고 있던 것. ⑤ 윤봉길 인():훙커우공원 거사 때 갖고 있던 뿔도장으로, “”이라 새겨져 있다. ⑥ 손수건:훙커우공원 거사 때 갖고 있던 것으로, 42cm×42cm의 면직 수건. ⑦ 안경집:훙커우공원 거사 때 갖고 있던 것으로 당시에는 안경이 있었으나 없어져 집만 남았다. ⑧ 일기():윤봉길의 21세 때 일기. ⑨ 월진회창립취지서():1929년 월진회를 창립할 때 자필로 쓴 것. ⑩ 농민독본():농민계몽을 위해 고향에서 쓴 책. ⑪ 형틀대 1개:1932년 12월 19일 윤봉길이 사형을 받을 당시 묶인 것. ⑫ 편지 4신(). ⑬ 월진회 통장 등 18종이다. 이 유품 중 ① ②는 국가소유로 장서각() 소장, ③∼⑫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杮) 윤종() 소장, ⑬은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윤남의() 소장이다.

2008년 4월 23일 
문화재청은 이 중 문화재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평가된 '연행사진' 2매와 '친필액자' 3점을 보물에서 지정 해제하였다. 

 출처:인터넷 검색창에서 전재


윤봉길 의사를 가장 존경하는 일본인

“윤봉길 의사가 이룬 일의 1%만 할 수 있어도 영광”

글 | 이상흔 조선pub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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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찾은 이토씨. 그의 요청으로 화질이 좋지 않은 사진을 사용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정신을 배우기 위해 매년 한국을 찾는 일본인이 있다. 일본 교토부(京都府) 출신의 이토 히로시(藤 浩志ㆍ45)씨는 김구(金九), 안중근(安重根), 윤봉길(尹奉吉) 선생 등 한국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에서 큰 족적(足跡)을 남긴 위인들의 기념관과 유적지를 찾아 참배를 하고, 그들의 정신을 배우기 위해 힘쓴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한국인은 윤봉길(尹奉吉) 의사(義士). 尹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일본군이 상해(上海) 사변 승리 후 상해 홍구(虹口)공원(현재 노신 공원)에서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기념행사와 전승 기념행사를 열자, 물통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 등을 죽이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토씨는 “한국의 역사적인 장소와 좋아하는 곳을 찾아가는 것은 나에게 일종의 성지(聖地) 순례나 마찬가지”라며 “그 가운데 윤봉길 의사의 생가(生家)는 나에게 정신적 ‘메카’와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그가 윤봉길 의사의 삶에 매료된 것은 김학준(金學俊) 전 동아일보 사장이 쓴 ‘매헌(梅軒) 윤봉길 평전’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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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 직전 자신이 직접 쓴 선서문을 목에 걸고 기념촬영을 한 윤봉길 의사.

“한국의 역사에 관심을 가졌던 저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를 읽게 되었고, 그 안에서 윤봉길 의사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습니다. 그 후 우연하게 어느 도서관에 들렀는데, 일어로 번역된 ‘윤봉길 평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호기심에 이끌려 그 책을 펼쳐들고 읽었는데,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토씨는 “윤봉길 의사는 당대의 훌륭한 지식인이었고, 또 학생들에게 일제(日帝)에 대적할 정신과 힘을 길러주기 위해 실용적인 학문을 가르친 선생님이었다”며 “그를 알아갈수록 그의 삶 하나하나가 존경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한국과 인연을 맺은 계기
 
이토씨는 한국의 대통령 가운데는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陸英修) 여사의 일생과 업적에 대해 낱낱이 꿰뚫고 있었다. 그가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박 대통령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한강의 기적은 그 어느 지도자도 이루지 못한 위대한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저에게 한국을 알게 해 준 사람입니다. 제가 1979년 한 주산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는데, 제가 일본으로 돌아간 직후 박 대통령이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 사건은 어린 저에게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35년간 저는 소위 ‘한국빠’로 지내오면서 한국을 알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왔습니다."
 
이토씨는 “초등학교 때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이 일본의 아주 작은 버전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거리에는 3층 이상의 건물이 없었습니다. 신문도 대부분 한자(漢字)로 되어 있고, 편집도 일본 신문과 똑같아서 그냥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처음에는 한국이 일본과 비슷하다는 것이 저의 호기심을 끌었습니다. 나중에 한국을 공부하면서 한국의 내면을 들여다보니까 한국은 일본과 완전히 다른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특히 한국 정치와 역사에 흥미가 있는데 솔직히 일본의 위인 중에는 존경하는 사람이나 관심 있는 인물이 없지만, 한국의 위인이나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대해서 어느 일본인보다도 많이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은 테러리스트 아냐"

-가족 중에 한국인과 결혼을 했거나 연관된 사람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을 알면 알수록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 저의 일본인 조상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여러 가지 잔혹한 짓을  많이 저질렀다는 데 대해 부채(負債) 의식을 느껴 왔습니다. 조상들이 저지른 죄값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은 마음에 매년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유적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본인이 저지른 잘못도 아닌데 너무 큰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 않나요.
 
“물론 제가 개인적으로 한국에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일본인 조상이 그랬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웃 국가와 국민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많은 일본인이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망언(妄言)을 해도 그것이 잘못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아베 총리의 우경화 행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는 아베 총리를 ‘아베양’ 혹은 ‘아베짱’(어린 아이같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으로 무시하는 의미)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는 오직 미국의 눈치를 보며, 오직 미국의 비위를 맞추는 정치인입니다. 그가 추구하는 자위대 강군(强軍) 정책이나 해외 파병도 결국 일본군을 미군에 종속시키는 행위라고 봅니다.”
 
-꼬일대로 꼬인 한일(韓日) 관계를 어떻게 풀었으면 하나요.
 
“아베를 쫓아내면 됩니다. 그는 이미 7~8년 전 1차 내각 때 아주 우익적인 발언을 한 전력이 있습니다. 현재 일본 국민은 아베가 어떤 정치인지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지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보통의 일본 사람들보고 ‘아베노믹스가’ 무엇인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본 관방장관이나 아베 내각은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한 적이 있는데요.
 
“안중근 의사는 절대로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 테러의 사전적 정의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고한 다수의 사람이 피해를 입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조국을 침략한 특정 인물을 타겟으로 삼아 위해를 가했습니다. 안중근에게 살해당한 이토 히로부미는 특별한 철학이나 정책이 없는 권위주의적 인물이었습니다.”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과가 韓日 관계의 출발점"
 
-안중근은 어떤 사람이라고 보는지요.
 
“안중근은 고귀한 인품을 지닌 지식인었습니다. 그는 이토를 살해한 행위가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가 말한 동양평화는 자신의 조국을 빼앗기 위해 혈안이 된 일본까지 포함하는 전(全) 동아시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점만 봐도 그는 숭고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안중근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 단지 이토라는 훌륭한 정치인이 한국인의 손에 죽었다는 것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본인의 정치적 성향이 좌파나 우파 중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는지.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고, 저 자신도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이토씨는 “일본 정부가 한국 강점에 대해 한국인들에게 진실한 사과를 하고, 식민통치기간 저지른 잔혹한 행위에 대해 보상을 시작하기 전까지 일제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는 “윤봉길 의사가 했던 일의 1%만 내가 해낼 수 있어도 영광”이라며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국에 건너와 아이들에게 실용 학문을 가르치며 윤봉길 의사의 정신을 잇는 일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최근 영화 ‘명량’이 흥행하자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일본의 군인들이 먼저 알아보았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광복절을 맞아 국적과 인종에 상관없이 위인의 삶과 인품 자체를 존경하고, 따르려는 일본인을 만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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