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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6)] 소현세자를 죽게 한 부왕 인조의 권력욕
 

▎명나라의 마지막 장수 오삼계가 지키던 산해관에 ‘천하제일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산해관까지 가서 명군이 청군에게 항복하는 장면을 목도했다.




 

[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6)] 소현세자를 죽게 한 부왕 인조의 권력욕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갈 땐 정신적으로 큰 스트레스 받게 하더니 영구귀국 후에도 끊임없는 의심·견제로 결국 34세에 세상 등지게 해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인조는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지만 끊임없는 안팎의 도전에 시달렸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거처하던 충남 공주시 공산성(公山城) 안의 영은사.
17세기 조선은 나라 안팎의 도전으로 몸살을 알았다. 명나라를 중심으로 안정됐던 동북아 국제질서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크게 요동쳤다. 만주에서 발흥한 여진족의 후금은 대륙의 패권을 놓고 명나라와 충돌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계승자들이 열도의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 조선에서는 인조반정의 후폭풍이 계속 몰아쳤다.

첫 번째 후폭풍은 이괄의 난이었다. 반정공신 중의 일원이던 이괄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1624년(인조 2) 1월의 일이었다. 인조반정이 있었던 1623년 3월부터 겨우 10개월 만이었다. 이괄의 반란군은 2월 10일에 한양을 점령했고 선조의 11번째 아들인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하기까지 했다. 공주까지 파천했던 인조는 2월 22일에야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괄의 난 이후에도 내우외환은 계속됐다. 1627년(인조 5) 1월에는 만주의 후금이 정묘호란을 도발했고, 1627년 10월에는 횡성에서 이인거의 무력 반란이 일어났다. 1628년(인조 6) 1월에 유효립의 역모사건이 있었으며 1636년(인조 14) 겨울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50일가량 저항했지만 결국 항복했다. 1637(인조 15) 2월 8일, 소현세자는 인질이 돼 강빈·봉림대군 등과 함께 한양을 출발해 심양으로 향했다. 당시 소현세자의 나이 26세였다. 궁궐의 따뜻한 온돌방에서 생활하던 세자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군사의 막사에서 노숙했다. 갑작스러운 잠자리의 변화 그리고 인질로 잡혀가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 등으로 세자는 병이 들었다.

4월 10일, 심양에 도착한 세자는 한 달이 넘도록 질병에 시달렸다. 세자보다 강빈의 상태가 더 심각했다. 이에 배종의관 정남수는 강빈을 치료하기 위한 약재를 보내달라고 본국에 요청해 허락받았다. 이후 세자와 강빈의 병세가 심각해질 경우 배종의관이 본국에 보고하고 처방전 및 약물을 받는 것이 관례화됐다.

“참고 또 참아야 하느니라”


▎경기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소현세자의 무덤 소경원.
배종의관이 처음 소현세자의 병세를 본국에 보고하고 처방전과 약물을 요청한 때는 1638년(인조 16) 4월, 세자가 심양에 도착한 지 1년쯤 지난 시점이었다. 세자는 산증(疝症)으로 4월 18일부터 침을 맞기 시작했는데 차도가 없자 뜸까지 떠야 했다. 이에 배종의관이 본국에 보고해 처방전과 약물을 요청했던 것이다. 보고서가 한양에 접수된 때는 5월 2일이었으므로 그 보고서는 심양에서 4월 말쯤 작성·발송됐을 것이다. 내의원 어의들은 병증에 따른 치료약을 정해 보냈다.

당시 소현세자가 앓던 병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배종의관은 산증으로 진단해 태충혈(太衝血)에 침을 놓았고 대돈혈(大敦血)에 뜸을 떴다. 한양의 어의들 역시 산증으로 판단했다. 산증은 산병(疝病)이라고도 하는데, 한기가 뭉쳐서 생기는 병이라고 한다. 배종의관과 한양의 어의들은 소현세자가 만주의 찬 기운으로 산증에 걸렸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세자의 병은 갑작스러운 산증이 아닙니다. 너무 염려해서 병든 것이 분명합니다. 국왕이 세자를 보낼 때 당부한 경계가 있어 지나치게 신경 써서 손상돼 병든 것입니다. 마음을 넉넉히 갖고 신중히 조섭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세자와 이별할 때 인조는 “힘쓰도록 하라(勉之哉), 지나치게 화를 내지 말라(勿激怒), 경솔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勿見輕)”의 세 가지를 훈계했다. 이 훈계는 결국 참고 또 참으라는 말과 같았다. 세자는 인조의 훈계에 따라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을 극도로 참고 또 참았다.

그래서 물설고 낯선 이국땅에 인질로 잡혀온 세자가 자신의 처지를 극도의 인내로 감내하면서 몸과 마음이 병들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런 면에서 소현세자의 병은 의관들의 소견대로 산증일 수도 있지만 용골대의 의견대로 정신적 스트레스일 수도 있었다.

소현세자는 1637년(인조 15)부터 1645년(인조 23)까지 8년간 심양에서 인질생활을 하는 동안 매년 질병을 앓고 치료를 받았다. 그러는 동안 세자가 처한 현실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악화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자와 인조 사이의 관계가 멀어졌고 그럴수록 세자는 인조로부터 큰 심리적 압박을 받았다. 청나라 사람들로부터 받는 심리적 압박도 여전했다. 세자는 인질생활 내내 병을 앓았고 증세가 심각해지면 본국에 보고해 처방전과 약재를 받아오곤 했다.

소현세자가 인질생활을 시작한 지 7년째가 되던 해인 1644년(인조 22년) 3월 청나라는 명나라의 북경을 점령했다. 당시 세자는 청나라 군대를 따라 북경까지 갔다가 다시 심양으로 돌아왔다. 중국 대륙을 정복한 청나라 황제는 1644년(인조 22년) 11월 1일 북경에서 황제에 등극했다. 그때 세자는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또다시 심양에서 북경으로 가야 했다.

중국대륙을 정복한 이상 청나라는 소현세자를 인질로 잡아둘 필요가 없었다. 11월 11일 청나라 황제는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을 명했다. 이에 따라 세자는 11월 20일 북경을 출발해 심양으로 향했다. 인질이 돼 한양을 떠난 때가 1637년(인조 15년) 2월 8일이었으니, 그동안 7년하고도 반년이 더 넘은 세월이 흘렀다. 26세의 청년으로 고국을 떠났던 소현세자는 이미 33세의 장년이었다.

아들의 환향(還鄕)에 ‘불안감’ 고조

11월 20일 북경을 떠날 때만 해도 소현세자는 건강했다. 하지만 북경을 출발한 직후부터 다시 건강이 나빠졌다. 길을 서두르지 못한 소현세자는 1645년(인조 23) 1월 9일에야 심양에 도착했고 그 전후로 또 큰 병을 앓았다. 그 병은 조선에 보고해야 할 정도로 위중했다.

소현세자의 병세가 조선에 알려진 때는 1월 10일이었으므로 배종의관의 보고서는 그 이전에 작성됐을 것이다. 그것은 곧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심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들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세자의 병세가 배종의관의 실력으로는 고칠 수 없었을 정도로 심각했음을 뜻한다.

배종의관이 세자의 질병 증세를 자세히 기록해 조선으로 보낸 이유는 이전처럼 본국의 어의들로 부터 처방전과 약재를 받으려는 목적에서였다. 배종의관이 보낸 보고서에 근거해 내의원에서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처방전과 약재 그리고 어의를 파견했다.

그 덕분에 병세가 많이 좋아져 소현세자는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1월 말쯤 압록강을 건넌 세자는 도중에 다시 병이 도져 평양에 머물며 요양해야 할 정도로 악화됐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소현세자가 한양에 도착한 때는 2월 18일이었다.

인조가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을 알게 된 시점은 1644년(인조 22) 12월 4일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은 인조에게 희소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겉으로 봐선 희소식이었지만 속으로는 의심과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흉보(凶報)이기도 했다.

12월 6일 인조는 조정 중신들을 불러 모았다.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청나라 칙사와 함께 오기로 해 칙사영접 등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인조는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을 대하는 자신의 미묘한 심정을 드러냈다.

의례적인 인사 후 우의정 서경우가 중신들을 대표해 “세자가 본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뜻밖의 일로서 조종의 신령이 은밀하게 도와서 그렇게 된 것이니 국가의 경사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은 나라의 큰 경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인조는 “청나라의 이 조치는 정말 좋은 뜻에서 나왔고 딴 마음은 없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을 허락한 청나라에 음모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었다. 음모란 다른 것이 아니라 청나라가 인조를 폐위하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옹립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혹 ‘소현세자가 친청파(親淸派)로 전향해 자신과 조선을 배신하지는 않을까’ 하고 의심했던 것이다. 서경우는 “다른 염려는 없을 듯합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인조는 “경들의 뜻도 다 그런가”라고 물었고 중신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여기에서 인조와 조정 중신들의 생각이 확연히 드러났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을 의심하고 불안해했지만 중신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인조의 의심과 불안은 그 후로도 표출됐다. 12월 12일 소현세자와 청나라 사신들을 영접하기 위한 원접사 김육을 만난 자리에서였다. 김육은 “올해가 넘어가면 원손의 나이가 10세이니 입학과 혼례에 관한 일을 속히 결정해야 합니다”라고 요청했다.

조선시대 원손 또는 원자의 입학과 혼례는 세손 또는 세자로 책봉될 때 거행했다. 원손이 단지 왕의 큰손자라는 의미라면 세손은 왕위를 계승할 손자라는 의미였으므로 곧 후계자로 공포한다는 뜻이었다. 김육은 원손을 세손으로 책봉할 것을 요청한 셈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이런 요청을 받은 인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태도는 물론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에 대한 의심과 불안에서 비롯됐다고 하겠다.

세자, 거의 다 기력을 회복했는데…


▎소현세자가 죽은 창경궁 내 환경전.
인조의 의심과 불안은 건강을 해칠 정도로 심각했다. 영구귀국 소식을 들은 이후로 인조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는데 딱히 원인이 없었다. 이전에도 인조는 극심한 의심이나 불안 또는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 특별한 이유도 없이 병을 앓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의심과 불안으로 인한 질병은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일종의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인식이 없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사람이 아프면 사악한 기운이 들어서이거나 아니면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이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을 괴질(怪疾) 또는 사질(邪疾)이라고 했다.

인조의 건강은 1645년(인조 23)으로 접어들면서 점점 심해졌다.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이 세자는 물론 인조에게도 질병을 불러왔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세자는 북경에서 귀국길에 오른 이후로 건강이 악화됐고, 인조는 세자의 귀국 소식을 들은 이후로 한층 심해졌다.

세자의 배종의관이 조선의 어의들에게 처방을 요청하던 그 즈음, 인조는 특명으로 이형익을 불러들였다. 1645년(인조 23) 1월 4일이었다. 이후 인조는 이형익으로부터 번침(燔鍼)을 맞기 시작했다. 10여 년 전부터 이형익은 인조의 괴질 또는 사질을 전담하던 어의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형익의 번침을 맞고 인조의 증세는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소현세자가 한양에 들어온 이후 다시 악화됐다. 2월 하순과 3월 초순에 인조는 거의 매일 이형익의 번침을 맞았다. 그만큼 인조의 의심과 불안이 컸다고 하겠다.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이 인조에겐 재앙이었던 셈이다.

세자에게도 영구귀국이 마냥 축복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세자의 한양 입성은 기쁨과 희망으로 넘쳐나야 할 금의환향이었다. 8년 가까운 인질생활을 끝내고 부모형제의 품으로 돌아오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2월 8일 한양에 도착 직후 세자는 질병에 시달렸다. 2월 20일 약방에서는 어의들로 하여금 세자를 진찰하게 하자고 요청했다. 최득룡·유후성·박군 등 어의들이 진찰했고, 처방에 따라 소현세자는 20일부터 24일까지 이모영수탕(二母寧嗽湯) 5첩을 복용했다.

하지만 차도가 없었다. 게다가 가슴이 답답하고 위산이 올라오는 증세까지 더해졌다. 24일에 세자를 진찰한 어의들은 “이런 여러 증세는 모두 가래가 콱 막혀서 생겼습니다”라고 진단했는데 ‘여독’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모영수탕 5첩을 더 처방했지만 호전되지 않았고 고열 증세는 더욱 악화됐다.

어의들의 노력도 허사로 돌아가고


▎명나라의 마지막 장수 오삼계가 지키던 산해관에 ‘천하제일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산해관까지 가서 명군이 청군에게 항복하는 장면을 목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26일에 다시 어의들이 세자를 진찰했다. 그런데 그날의 진찰에는 새로 이형익이 참여했다. 기왕의 어의들이 내린 처방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이형익이 추가로 투입된 것이었다. 그날 이형익을 비롯한 어의들은 이전의 이모영수탕 대신에 소시탕(小柴湯)을 처방해 올렸다. 이 처방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세자의 증세는 아주 호전됐다. 3월 5일에 있었던 어의들의 진찰에 따르면 세자의 증상은 3분의 2가량 치료됐다.

세자는 3월 6일부터 탕약을 복용하면서 침도 맞았다. 침은 이형익이 놓았다. 소현세자는 이형익의 번침을 3차례 맞고 눈에 띄게 차도를 보였다. 3월 14일까지 5차례 침을 맞은 소현세자는 거의 완치됐다. 약간 열이 남아 있었지만 별로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14일부터 소현세자는 더 이상 탕약을 먹지도 않았고 침을 맞지도 않았다. 세자가 이 정도로 회복된 데는 무엇보다도 이형익의 번침이 유효했다. 15일에 인조는 세자의 기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타락죽을 하루걸러 하루씩 동궁에 들이게 했다. 타락죽은 우유와 쌀로 만든 죽으로서, 조선시대 국왕의 대표적인 보양식이었다. 4월 16일에 세자는 주치의 박군에게 거의 나았다고 말할 정도로 기력을 회복했다.

그러던 세자가 4월 21일부터 갑자기 오한과 한전(寒戰) 증세를 보였다. 하지만 그날의 한전 증세는 두어 시간 후에 없어졌고 다음날에는 아무런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세자 본인이나 약방에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23일 오전에 또다시 오한과 한전 증세가 나타나 한나절이나 지속됐다. 이에 약방에서는 23일에 어의 박군 등을 시켜 세자를 진찰하게 했는데 ‘학질’로 진단됐다. 어의 박군은 탕약만으로는 금방 효과를 볼 수 없다고 해 24일 새벽부터 이형익의 침을 맞도록 요청했다.

비록 어의 박군 등은 ‘학질’로 진단하고 처방전도 그에 따라 내렸지만 정확한 병명을 알지는 못했다. 오한으로 부들부들 떨다가 고열이 나타나는 증상은 학질과 유사하기는 했지만 거기에 더해 기침과 가래까지 심각한 증상은 무엇 때문인지 몰랐던 것이다.

이런 괴질이나 사질은 이형익이 가장 잘 치료한다고 소문나 있었다. 그래서 이형익의 번침으로써 소현세자의 고열을 내리게 하려 했다. 이에 따라 소현세자는 4월 24일부터 이형익에게서 번침을 맞았다.

3월 14일부터 탕약과 침을 끊었던 세자는 4월 24일에 어의 박군이 처방한 시호지모탕(柴胡知母湯)을 복용했다. 아울러 이형익의 번침도 맞았다. 이전에 이형익의 번침술이 소현세자의 병을 완치했었기에 또다시 맡긴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25일에 약방에서는 상한증(傷寒症)을 잘 고치기로 소문난 최득룡으로 하여금 박군과 함께 소현세자의 진찰과 치료를 담당하게 했다.

24일까지만 해도 약방에서는 세자의 증세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아 박군 혼자에게만 진찰과 치료를 맡겼는데, 차도가 없자 다시 최득룡을 추가 투입했던 것이다. 25일에 세자는 이형익의 번침을 맞고 또 어의 박군이 처방한 시호지모탕을 들었다. 그러나 증세는 여전히 호전되지 않았다.

소현세자는 25일에도 한약을 복용하고 번침을 맞았다. 그러나 병세는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26일 오전에 세자는 어의 최득룡이 처방한 시호탕을 들었다. 그런데 시호탕을 들고난 후 세자는 더욱 위중한 상태가 되었다. 약방에서는 이형익의 번침으로 위기를 넘기려 했지만 번침을 맞은 직후 창경궁 환경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가 1645년(인조 23) 4월 26일 정오였다. 당시 소현세자는 34세였다.

소현세자가 죽은 당일, 인조는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세자의 빈소로 갔다. 세자의 죽음을 보며 인조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혹 자신의 왕위를 빼앗을지도 모를 정적이었으니 잘 죽었다고 통쾌해했을까? 아들의 죽음을 막지 못한 자신의 무능을 원망했을까? 아니면 아들이 죽게 된 원인을 청나라에 돌리며 이를 갈았을까?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동안의 의심과 불안은 사라졌을 것이다.

기록으로 볼 때 소현세자의 직접적인 사인은 병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면 실제 소현세자를 병들게 하고 그래서 죽게 만든 원인은 인조 본인이었다. 젊은 소현세자가 병들어 죽은 이유는 인질생활을 하던 만주의 환경적 요인 그리고 조선과 청 사이에 끼여 양쪽의 눈치를 봐야만 했던 심리적 압박감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의 제공자는 바로 인조였다. 그래서 소현세자 사후에 독살설이 널리 퍼졌다. 예컨대 실록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소현세자는 고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병을 얻었고 병든 지 며칠 만에 죽었다. 그런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 나왔다. 검은색 천으로 세자의 얼굴을 반쪽만 가려놓았는데 옆에 있는 사람도 어느 쪽이 얼굴이고 어느 쪽이 천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세자의 얼굴색은 중독된 사람과 유사했다. 그렇지만 밖의 사람들은 알지 못했으며 임금도 또한 그것을 알지 못했다. 당시 종실인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는 인렬왕후 한씨의 배다른 동생이었다. 이세완이 왕비의 친척이었으므로 세자의 시체를 염습할 때 참여했는데, 그 이상한 모습을 보고 나와 사람들에게 말했다.” (<인조실록> 권46, 23년 6월 27일조)

폐탈지실의 우(愚)를 범한 왕

소현세자가 실제로 인조에 의해 독살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죽음은 병 때문이었고, 그 병은 인조 때문이었음이 확실하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끝없는 의심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었다. 인조는 혹시라도 청나라가 자신을 폐위시키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옹립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며 불안해했고, 그 의심과 불안이 소현세자를 병들게 했던 것이다.

인조는 자신의 의심과 불안이 세자 즉 국본(國本)을 병들게 하고 나아가 죽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국본이 병들면 그것은 곧 나라가 병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국본을 의심하지 말아야 하고 불안해하지도 말아야 했다.

국본과 관련된 <대학연의>의 가르침은 ‘정국본(定國本)’이다. 국본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이 ‘정국본’이다. ‘정국본’과 관련해 <대학연의>에서는 ‘위립지계(違立之計)’, ‘유교지법(諭敎之法)’, ‘적서지분(嫡庶之分)’, ‘폐탈지실(廢奪之失)’ 등 네 가지를 가르친다.

‘위립지계’는 법과 원칙을 어기고 거짓 국본을 세우려는 마음 자체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고, ‘유교지법’은 국본을 세운 후에는 처음부터 잘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며, ‘적서지분’은 군주가 후궁에게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고, ‘폐탈지실’은 군주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국본을 흔들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 중에서 인조가 의심과 불안으로 소현세자를 병들어 죽게 한 것은 ‘폐탈지실’의 우를 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학연의>에서는 군주가 ‘폐탈지실’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재상의 충고를 따르라 가르친다.

비록 부자관계이지만 군주와 세자는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다. 그래서 의심하고 불안해하기 십상이다. 그런 의심과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나라의 여론을 대변하는 재상의 충고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에서는 끊임없이 ‘폐탈지실’의 우가 반복되니 슬프고 두렵지 않을 수 없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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