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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 피난처에서 피어난 망명객의 애잔한 사랑
 


윤봉길 의사의 거사 현장인 훙커우공원은 현재 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윤봉길 의사를 기념하는 루쉰공원 내 매헌에서 바라본 매화.




[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 피난처에서 피어난 망명객의 애잔한 사랑 

신톈디 옆 마당로 청사는 두 번째… 첫 임정 청사 터는 루이완프라자 공터 

윤태옥 작가, 다큐멘터리 제작자
 
3·1운동으로 결집된 해방을 향한 민족의 의지는 임시정부로 꽃을 피웠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앞날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그 지난했던 흔적이 상하이 시내와 도시 인근에 흩어져 있다. 첫 임정 청사 터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 그리고 그로 인해 급히 피신한 김구의 피난처까지…. 피난처에서는 노 망명객과 그를 보살피던 처녀 뱃사공의 애잔한 사랑이 얽혀 있다. 그 길을 따라가보았다.

▎현재 상하이 루이안플라자 앞 빈 터로 남아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청사 부지와 유일하게 남은 당시 청사 사진.
대한민국 헌법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법통은 물론 ‘대한민국’이란 국호도, ‘공화’라는 국체도 임시정부에서 그대로 이어받았다. 심지어 초대 대통령까지도….

임시정부는 광복의 순간까지 조선인 또는 한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강하게 항거했다는 징표이자 국제사회에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근거의 하나였다. 임시정부를 이어받은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도 전쟁과 국정파탄을 극복하고 정치·경제적으로 기적적 성장을 이룬 보기 드문 국가 사례다.

그럼에도 임시정부는 동전의 양면을 갖고 있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굵은 줄기였지만 전체 민족의 다수를 충분히 끌어안지는 못했다. 대한민국은 아직 두 동강난 민족의 반 토막일 뿐이고, 여전히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임정과 대한민국이 공유한 ‘초대 대통령’에서도 동전의 한쪽 그늘이 짙게 드러난다. 임시정부는 초대 대통령을 탄핵해 쫓아냈고, 대한민국은 초대 대통령을 민중의 피를 흘려가며 하야시켰다.

이러한 임시정부의 양면은 독립운동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중국 현지답사에서도 임시정부의 비중은 높을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나라 잃은 망국노(亡國奴)였고, 뭉쳐서는 망명정부를 벗어날 수 없었던 중국대륙에서 임시정부의 흔적을 찾아 상하이(上海)로 간다.

빈 터로 남아 있는 첫 임시정부 청사


▎첫 임정 청사를 묘사한 <독립신문> 기사. 일본인 기자가 쓴 1919년 <상해일일신문>의 기사를 전재한 것이다.
임시정부라고 하면 대부분 상하이 마당로(馬當路) 302~4호의 임시정부 청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내게 그곳은 늘 두 번째로 밀려난다. 첫 번째는 당연히 1919년 임시정부가 처음 만들어진 자리다. 상하이 지하철 1호선 황피난루역(黃陂南路站) 2번 출구 바로 앞, 화이하이중로(淮河中路)와 마당로가 교차하는 사거리의 동남쪽 코너에 루이안플라자(瑞安廣場)가 있다. 루이안플라자의 앞마당이 바로 그곳이다. 플라자 입구와 인도 사이에 호젓하게 넓은 경관용 공간이다. 최초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곳에 있었던 한 건물에 자리 잡았다. 루이안플라자에는 ‘RUI AN PLAZA’가 아닌 ‘SHUI AN PLAZA’로 표기돼 있다. 방언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평소 한국인들도 많이 찾는 상하이의 대표 관광지인 ‘신톈디(新天地)’의 입구다. 이곳에서 마당로를 따라 남쪽으로 600m쯤 걸어가면 한국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그 임시정부 청사가 자리하고 있다. 바로 두 번째 임시정부 청사다.

1919년 첫 임시정부 청사 자리, 아무런 표지도 없는 이곳에 발길이 닿는 순간 다소 황망할 수 있다. 마땅히 시선을 줄 곳이 없다. 눈길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면 건물 경비원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살피기도 한다. 텅 빈 공간에서 시선을 추스르는 데 잠시 시간이 걸린다.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시선이 산만해지곤 한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현대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첫 임시정부 청사의 풍모는 어떠했을까? 1919년 <상해일일신문>의 일본인 기자가 당시 임시정부를 방문 취재했는데, 이를 <독립신문>이 전재(1919.9.30.자)한 기사가 남아 있다. 이 기사를 통해 당시 청사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당당한 집, 엄중한 경계, 정숙한 내부상태

한국 독립 가정부(假政府, 임시정부)가 프랑스 조계에 있다고 들었으나 한 번도 가서 본 일이 없었다. 어떤 곳인지 모르고 위험한 곳이라는 소문만 들었다. 그러나 조선독립당으로 흉도악한의 집합체는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방문했다. 의외로 큼직한 건물이 울창한 수목으로 가려져 있어, 형용해 말하자면 일국의 영사관 같다. 정원은 넓고 온실화원까지 있다. 문을 지키는 인도인(당시 상하이에는 붉은 터번을 머리에 두른 인도의 시크인들이 경찰보조나 경비원 등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과 교섭해 몇 사람 양복 입은 청년들이 응답했으나 수십 분이 지나도 도저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 같았다. 장시간 교섭에 겨우 얼굴이 희고 수염이 없는 청년이 접견하는데 최씨라고 하면서 시간이 없다고 하여 내일을 약속하고 돌아 나왔다. 첫날은 문 안으로 서너 걸음 들어간 것이다.

다음날도 문 앞에서 여러 번 거절당했으나 최종에 최씨와 면회하게 되었다. 그가 민족주의를 열정적으로 설파하는 것을 들으면서 관찰하니 내부의 질서는 무던히 정돈된 듯하다. 최씨는 독립운동의 근거가 심고함과 각자의 기관이 완비함을 역설하고 정부의 기초가 나날이 견고해지고 있다고 말하였으나 따로 들은 바가 있기로 내가 관찰한 바는 나중에 쓰기로 한다.”


키 큰 나무들, 붉은 터번의 인도 시크인 경비원, 정돈된 내부, 조선 민족주의에 대해 기염을 토하는 청년 등을 통해 1919년 가을의 임시정부를 대략이나마 상상할 수 있다. 전형적인 라오상하이(老上海)의 풍취가 느껴진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의 민족적 독립 의지가 모여 세워졌다. 3·1운동은 망국 10년 만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누적된 분노가 폭발한 대중운동이다. 국제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조(淸朝)가 사라졌고, 이듬해인 1912년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러시아에서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1918년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했다. 독일은 제정이 몰락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됐다.

3·1운동은 외부적으로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가장 큰 계기가 됐다. 민족자결주의는 전승국의 기만적인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1918년 1월 처음 발표됐을 당시에는 세계 곳곳의 약소민족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27개 전승국이 전후 처리를 위해 1919년 1월부터 파리에서 시작된 일련의 국제회의, 소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기로 했다.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는 동시에 3·1 만세시위를 통해 국제사회에 거족적 독립 의지를 강력하게 내보이려고 했다.

3·1운동은 천도교·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계의 조직을 통해 준비됐다. 종교지도자들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이름을 올렸고, 문장가 최남선이 독립선언문을 작성했다. 종교 조직과 학교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시위 계획이 전파됐다. 그러나 시위의 시작으로 알려진 3월 1일 정오 탑골공원에는 민족대표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민족대표들은 ‘폭력시위’를 우려해 종로의 한 식당에 모여 자체적인 선언식을 갖고 일본 경찰을 불러 자수했다. 침략자에 대항하는 민족의 대표라고 하기에는 어처구니가 없는 행동이었다.

시위는 불발에 그칠 뻔했다. 오후 2시 학생들이 이미 탑골공원으로 모여들었다. 시위 계획을 전달받고 황해도에서 상경한 서른세 살의 기독교 전도사인 정재용 역시 탑골공원에서 무엇인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는 시위에 방아쇠를 당기기로 예정된 사람이 아니었다.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결국 정재용은 스스로 나섰다. 떨리는 목소리로 품 안에 간직했던 독립선언서를 꺼내 제목부터 큰 소리로 읽어나갔다.

불발할 뻔했던 3·1운동


▎두 곳의 상하이 임시정부는 유명한 관광지인 신텐디(新天地)를 사이에 두고 600m 정도 떨어져 있다. 신텐디의 야외 카페.
“조선 독립 선언….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인의…”

학생들의 시선이 그의 입으로 모아지고, 낭독이 끝나는 순간 만세 소리가 터져나왔다!

“대한독립 만세!!”

이렇게 해서 아슬아슬하게 방아쇠가 당겨졌다. 시위는 폭발했다.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만세 시위가 시작됐다. 3월 중순에는 전국 소도시로 확산되고 농촌과 산골까지 퍼져나갔다. 시위는 조직화하며 확산됐다. 3월 하순에서 4월로 넘어가면서 일본 경찰의 폭력진압에 맞서는 공세적 시위가 크게 증가했다. 아울러 노동자대회가 시위로 연결되고 파업으로 퍼지면서 시위의 성격은 질적 변화를 보였다. 만세시위는 4월 10일을 전후로 절정을 이루었다. 이후 점차 수그러들면서 5월 말까지 계속됐다.

만세시위는 삼천리 방방곡곡을 넘어 해외로까지 퍼져 나갔다. 압록강 너머 서간도, 두만강 너머 북간도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도 마찬가지였다. 미주에서도 결의안을 채택하고 포고문을 발표했다. 시위 뉴스는 더 널리 퍼져나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조선인이 살아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지휘부가 없었다. 모든 것은 산발적이었다. 당연히 지휘부, 곧 정부 구성이 국내의 시위 현장 속에서, 국외의 운동가들 사이에서 뜨겁게 쏟아져 나왔다.

시위 현장에 뿌려진 수많은 전단 속에서 다섯 개의 임시정부 수립 방안이 제시됐다. 주요 인사의 이름까지 거론됐으나 공통점은 모두 공화제였다는 점이다. 대한제국의 부활, 곧 복벽주의가 아니었다. 서거한 고종에 대한 백성들의 애석함은 있었지만, 순종에 대한 기대는 없었던 것이다. 조선 왕조 혹은 대한제국은 이미 정치적으로는 소멸된 상태였다.

1919년 3월 17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20여 만 명의 조선인을 배경으로 대한국민의회가 만들어졌다. 상하이는 당시 동아시아 최대 국제도시였다. 1910년대 독립운동가들이 이미 상하이로 많이 몰려들었다. 이곳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달아올랐다. 국내와 만주·일본·러시아 등지의 운동가들이 상하이에 모여들었다. 1919년 4월 11일 각 지역의 대표로 구성한 임시의정회(의회)가 만들어졌다.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선포함으로써 임시정부의 골격을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9월 11일에는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공포했다.

한편으로는 상하이임시정부에 앞서 만들어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통합작업이 병행됐다. 그러나 통합 과정은 매끄럽지 못했다. 양측이 합의해 임시의정원과 대한국민의회를 각각 해산하고 통합하기로 했는데, 상하이임시정부 측에서 합의를 준수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미 해산을 결의했던 대한국민의회가 연해주에 다시 세워짐으로써 두 임시정부의 완전한 통합은 실패했다. 다만 연해주 측 핵심인사였던 이동휘가 1919년 11월 상하이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통합의 모습을 갖췄다.

백지상태에서 각지에서 각각 활동하던 다양한 성향의 운동가와 명망가들을 결집해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어려움을 감안한다면 상하이임시정부는 조선인 다수의 독립 의지를 망라했다고 할 수 있다. 3·1운동은 350~630명 피살, 800~1600명 부상, 8000~9000명 투옥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른 대가로 상하이임시정부를 얻은 셈이다.

그러나 2000만 동포의 의지가 모여들었던 첫 임시정부 청사 터에는 지금 조그만 표지 하나 없다. 중국인들이야 남의 나라의 옛 이야기일 뿐이니 관심을 가질 리 없다. 우리나라도 마당로의 임시정부가 있으니 이곳까지 손길이 닿지는 않은 모양이다. 당시 건물 사진도 독립기념관에서 갖고 있는 딱 한 장뿐이라고 한다. 중심가치고는 제법 널찍한 공간이 마련돼 있어 잠시나마 머뭇거릴 공간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루이안플라자에서 마당로의 두 번째 임시정부 청사까지 거리는 고작 600m 남짓이다. 걸어가도 15분이면 넉넉하다. 왕복 2차선의 이면도로를 따라 횡단보도 네 개만 건너면 된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 거리를 옮겨가는 과정, 즉 1920년부터 1926년 12월까지 임시정부의 부침은 안타까운 여정의 연속이었다. 임시정부는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내부의 갈등과 부실한 조직으로 인해 위축되고 쇠락했다. 임시정부가 공들여 추진했던 외교 교섭은 모두 실패했고, 명망가들은 분열했다. 머리는 컸지만 몸뚱이는 공중에 들려진 채 발은 땅바닥에 밀착시키지 못했다. 혼돈 그 자체였다.

신텐디(新天地) 인근 마당로의 임정 두 번째 청사


▎상하이의 유명 관광지인 신톈디(新天地) 인근 마당로의 청사는 임시정부의 두 번째 청사다.
당장의 독립운동 방략부터 아무런 규정 없이 공허했다. 다양하게 제시된 의견을 통합해내지 못한 채 논쟁에 논쟁을 거듭하다 분열하고 말았다. 이승만 등은 대미 외교에 치중하고자 했고, 만주와 연해주 출신 운동가들은 무장투쟁을 주장했다. 안창호는 모호한 실력양성론이었다. 기호파·서북파·미국파 등 지역에 따른 갈등도 가미됐다. 자금 문제는 갈등을 증폭시켰다.

무엇보다 1920년 전후 임시정부가 가장 중요하게 추진했던 외교 교섭이 모두 실패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걸었던 희망은 헛발질이었다. 파리강화회의는 전승국의 논공행상 파티였다. 패전국의 식민지를 나눠 먹자는 것이지,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그곳에 끼어들어 독립을 도모해 보겠다는 것은 애당초부터 헛짚은 것이었다. 외교는 정의의 토론장이 아니다. 싸늘한 현실을 등에 지고 강자 중심으로 벌어지는 화려한 가면무도회다.

외교론과는 정반대의 발상을 했던 김원봉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김원봉은 “민족의 사활이 걸린 큰 문제를 외국인에게 호소해 그들의 결정을 기다린다는 것은 할 일이 아니다. 열국이 무엇 때문에 우호국과 원수를 맺으면서까지 약소민족을 위해 싸워줄 것인가?”라고 주장했다. 김원봉은 비밀리에 뜻을 같이하던 김철성에게 권총과 실탄을 주어 파리로 보냈다. 파리강화회의 현장에서 일본 대표를 보란 듯이 척살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했다. 누군가 김철성의 행장에서 권총과 실탄을 빼돌렸던 것이다.

그 다음해에 이어진 태평양회의를 목표로 한 외교활동도 실패했다. 임시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비판이 고조됐다. 이승만이 미국에 “국제연맹의 위임을 받아 조선을 통치해 달라”는 소위 위임통치 청원 사실이 드러나면서 강력한 비난이 쏟아졌다. 이승만의 청원은 조선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독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43년 12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처리를 준비하는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은 한국에 대한 40년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으니 미국이 이승만의 청원을 외교정책으로 채택했다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는 꼴이 됐다.

임시정부는 재정과 조직에서도 실패했다. 1920년 임시정부는 교통국을 설치하고 비밀 행정조직으로 연통제를 통해 국내와 만주의 조선인들과 연결하고자 했다. 연통제는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실행하는 중요한 몸체였으며 자금줄이었다. 그러나 1921년 들어서면서 교통국 조직이 일제의 검거로 무너졌다. 임시정부는 조선의 인민들과는 괴리된 채 물 떠난 물고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성과는 없고 대중조직에도 실패했으니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1923년 4월 이승만 탄핵안이 임시의정원에 제출됐고, 1924년 9월에는 ‘대통령 유고’가 결정됐다. 임시의정원은 12월 박은식을 대통령 대리로 추대했고, 다음해 3월 이승만을 탄핵해 면직시켰다. 이승만은 이에 반발해 미주동포로부터 거둬들인 독립운동자금을 임시정부에 넘기지 않고 자신의 대통령 행세에 사용했다. 임시정부의 자금난은 더욱 심해졌다.

만주에서의 무장투쟁 역시 빛나는 승전 뒤에 거센 역풍을 맞았다. 만주의 독립군들은 통일된 체계를 갖추지 못했지만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10월의 청산리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두 번의 승전은 일본은 물론 중국에도 큰 충격이었다. 청일전쟁·러일전쟁에 이어 제1차 세계대전까지 연전연승을 구가하던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민병대 수준의 독립군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승리가 안겨준 자긍심은 하늘을 찔렀지만 일제의 보복으로 선혈이 낭자했다. 일본은 군대를 증파해 대대적 토벌작전을 전개하는 한편 독립군이 뿌리를 내린 북간도 지역의 조선인 부락을 무차별적으로 초토화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3600여 명이 피살되고 상당수의 가옥이 불탔다. 독립군은 소련 땅 연해주로 밀려갔다. 약소민족을 지원한다는 레닌의 정책을 믿은 것이다. 그러나 독립군을 받아주면 대일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는 일본의 강한 반발로 소련은 조선 독립군의 무장을 해제하려 했다. 독립군은 이에 반발했고, 결국 소련군의 공격을 받아 수많은 독립투사가 허무하게 학살당했다. 주변 강국으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한 가슴 아픈 망국의 참혹한 현실이었다.

상하이임시정부를 주목시킨 김구의 ‘의열투쟁


▎윤봉길 의사의 거사 현장인 훙커우공원은 현재 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윤봉길 의사를 기념하는 루쉰공원 내 매헌에서 바라본 매화.
임시정부 외부에서 임시정부와 이승만을 비판하는 세력은 주로 베이징에 많았다. 이들 임정 비판세력은 1920년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제기된 주요한 비판은 “위임통치를 주장한 이승만을 유임시켜 민족의 체면을 손상한 점, 사당(私黨)을 불식하지 않아 민심을 분열시킨 점 등이다. 임시의정원이 널리 국내외 동포의 의사를 구하지 않고 극소수의 사람만으로 대표를 구성한 점, 위임통치를 주장한 이승만과 이를 인지한 안창호를 각기 국무총리와 내무총장으로 임명한 점, 대한국민의회와 사기적 교섭을 한 점 등을 들어 임시의정원을 불승인한다”는 것이었다.

1921년 상하이의 주요 운동가들은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자고 제창했다. 베이징의 임정 비판 세력들이 이에 동조했고,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들도 이승만 퇴진과 임정의 개혁을 요구했다. 1923년 1월 지역대표와 단체대표로 인정된 130여 명이 상하이에 모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했다. 독립운동 사상 가장 큰 규모의 회의가 4개월 정도 지속됐다.

참석자들은 임시정부를 새로 만들자는 창조파와 임정을 개혁하자는 개조파로 나뉘었다. 두 주장이 맞서다 개조파가 대회에서 탈퇴하는 바람에 반쪽이 됐다. 창조파 80여 명이 남아 새 임시정부로 조선공화국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우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새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해 1923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러나 그 다음해 2월 소련이 이들에게 국외 퇴거를 요구하면서 조선공화국 수립 자체가 무산됐다. 국민대표회의도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내분과 논쟁을 거치며 쪼그라들어 간판만 남게 됐다. 1925년 박은식이 사망한 이후 1년 동안은 임시정부 수반인 국무령도 공석이고 내각을 구성하지도 못한 채 정치적 빈혈 상태에서 휘청거렸다. 1926년 12월 김구가 국무령 직을 수락해 그나마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26년부터 임시정부가 자리잡았던 곳이 바로 최근 많은 한국인이 찾는 마당로의 임시정부다. 상하이 도심 신텐디(新天地) 근처 푸칭리(普慶里) 골목 안이다. 연립주택 세 채를 묶어 복원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하이시 루완(盧灣)구 인민정부가 1990년 루완구의 보호문물로 지정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舊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훙커우(虹口)공원 의거를 성공시키고, 그 후폭풍으로 항저우((杭州)로 옮겨갈 때까지 임시정부는 이곳에 있었다.

김구가 정치적 빈혈로 허덕이던 임시정부를 위해 만든 출구는 의열투쟁이었다. 임시정부는 김구의 책임 아래 1931년 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만들었다. 일본 제국주의 요인을 암살하거나 주요 시설을 폭파하는 것이었다. 1920년대 전반 임시정부는 김원봉의 의열단 투쟁을 부정했다. 1922년 3월 의열단이 상하이 와이탄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 임시정부는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밝히면서, 과격주의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비난해 많은 독립운동가들로부터 비난을 자초하기도 했다. 그랬던 임시정부가 의열투쟁을 도입한 것이다.

임시정부 의열투쟁의 가장 극적인 성과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훙커우공원 의거다. 일본군은 1932년 1월 상하이사변을 일으켜 상하이에 진주했고, 일왕의 생일에 맞춰 전승 축하 행사를 훙커우공원에서 거행했다. 이 행사장에 잠입한 윤봉길은 단상을 향해 폭탄을 투척했다. 폭탄은 강도 일본의 상하이 수뇌부 면상에서 폭발했다. 조선과 중국 침략에 앞장서온 군부와 정·관계 핵심 인물 다수를 살상했다. 일본은 경악했다. 조선인들은 살아있는 항일투쟁에 환호했다. 중국은 조선의 강력한 항일투쟁에 놀랐고, 세계는 조선이 살아있음을 다시 인식했다. 특히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를 격동 시켰다. 이 사건 이후 장제스는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다. 윤봉길이 임시정부를 회생시킨 것이다.

윤봉길의 훙커우 의거에 중국인들까지 격동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일제의 단속을 피해 임시정부는 급히 상하이를 떠나 유랑길에 오른다. 이후 임시정부의 이동 경로지도.
후폭풍은 거셌다. 김구를 포함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모두 잠적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후 김구의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전장(鎭江)-창사(長沙)-광저우(廣州)-류저우(柳州), 그리고 치장(綦江)을 거쳐 1940년 충칭(重慶)에 자리 잡을 때까지 유랑과 다름없는 고난을 감수해야 했다.

임시정부를 되살려낸 윤봉길의 거사 현장인 훙커우공원은 지금 루쉰공원(魯迅公園)으로 바뀌어 있다. 루쉰공원 안에 입장료를 따로 내고 들어갈 수 있는 매원(梅園)의 매헌(梅軒)이 바로 윤봉길의 생애사적 진열관이다. 윤봉길의 생애와 거사의 앞뒤를 설명하는 자료들이 깔끔하게 전시돼 있다. 그의 전기를 입체적으로 읽는 것 같다. 서울 양재동의 ‘시민의 숲’에도 윤봉길 동상과 매헌기념관이 있다.

장제스의 윤봉길 찬사는 대단했다. 장제스가 “중국의 100만 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1969년에는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헌시를 써 윤봉길 기념사업회에 보내기도 했다.

別順逆辦是非(순리와 역리를 분별하고 옳고 그름을 판별하였고)
明大義知生死(대의를 밝히고 생사의 도를 깨달았구나.)
留正氣在天地之間(하늘과 땅 사이에 정의의 기개를 남겼으며)
取義成仁永垂不朽(의를 취하여 인을 이루니 영원할 것이라.)


상하이의 유서 깊은 공원 한가운데 있는 윤봉길전시관은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되새기게 한다. 윤봉길의 의거는 장제스 시대에 장제스 관할지역에서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중화민국은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윤봉길기념관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신중국이 배려한 것이다. 마오쩌둥의 공산당 역시 타이항산(太行山) 지역에서 팔로군이 조선의용대와 합동작전을 펼쳤다. 만주에서는 동북 항일연군 등을 통해 조선인과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장제스의 중국이든 마오쩌둥의 중국이든, 중국이 우리 독립운동의 실질적 동맹이란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는 데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윤봉길기념관에서 내 머릿속에 진하게 남겨진 한마디는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는 집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윤봉길이 집을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그는 집을 떠나 남의 나라 땅에서 거사를 일으켰고, 일본의 사형장에서 죽어 해방된 뒤에야 유골함에 실려 돌아왔다.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장중하고 묵직하다. 소심한 생활인으로서는 그것을 읽기조차 버겁다.

윤봉길의 폭탄이 터지기 직전부터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기 시작했다. 일본 경찰과 헌병대는 조선인이란 조선인은 전부 잡아들일 듯 악을 쓰고 상하이 전역을 들쑤시고 다녔다. 김구와 임시정부는 서둘러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로 도피했다. 항저우에서도 이리 숨고 저리 옮기면서 18개월 정도를 버텼다. 타국에서의 도피란 누군가의 적극적 방조가 있어야 한다. 바로 장제스의 중화민국과 중국인들이었다. 쑨원(孫文)의 중화민국도 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장제스의 중화민국도 1942년에야 임시정부를 승인했다. 임시정부가 조선 전체를 대표하기엔 역부족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임시정부를 승인해 일본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게 그들의 국익에 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내밀하게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국제조약은 없었지만 실질관계로 보면 임시정부의 동맹은 이승만이 매달리던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미국 정부는 1948년 모스크바 3상회의까지 단 한 번도 조선의 독립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끝까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

독립운동의 실질적 동맹은 중국


▎1, 2. 자싱(嘉興)시 중심부의 고풍스러운 맛이 나는 옛 거리 메이완(梅灣)가 남쪽에 접한 시난후(西南湖) 주변의 김구 피난처. 김구는 이곳에서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 (朱愛寶)와 부부 행세를 하며 지냈다. / 3. 김구의 두 번째 피신처인 차이칭 별장(載靑別墅).
쑨원의 중화민국,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마오쩌둥의 공산당 모두 조선인에게는 실질적인 동맹이었고 고마운 이웃이었다. 그 증표의 하나가 상하이를 탈출한 김구와 임시정부에 대한 중화민국과 중국인의 적극적인 지원이다. 당시뿐 아니라 지금도 그렇다. 지금의 중국정부가 사적지로 보존하는 항저우의 김구 피난처 두 곳에서도 독립운동의 실질적 동맹이 누구였는지 느낄 수 있다.

김구 피난처 중 한 곳은 상하이 중심에서 서남쪽으로 110여㎞ 떨어진 자싱(嘉興)시 중심부의 메이완(梅灣)가라는 옛 거리에 있다. 고풍스러운 맛이 나는 옛 거리다. 깔끔하게 잘 복원돼 있다. 여행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메이완가 남쪽에 접해 있는 시난후(西南湖) 가에 김구의 피난처가 있다. 메이완가 안내판에 표시돼 있어 찾기도 쉽다. 관리인이 상주하는데, 2층의 김구 침실까지 둘러볼 수 있다.

김구를 피신시킨 사람은 국민당 원로이자 당시 상하이 항일구원회 회장인 추푸청(楮輔成)이다. 당시 일제는 상하이사변에서 승리해 상하이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니 훙커우사건의 책임자를 숨겨준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김구를 수륜사(秀綸絲)라는 공장에 피신시켰다 동탑사(東塔寺)를 거쳐 이곳으로 옮기게 했다.

김구가 피신한 집은 추푸청의 수양아들인 천퉁성(陳桐生)의 집이다. 2층 집인데 김구는 2층 침실에 기거했다. 침실 바닥에는 1층 현관 쪽을 내다볼 수 있는 조그만 창을 냈다. 1층 복도로 내려가 바로 쪽배를 타고 나갈 수 있는 비상구와 사다리도 있다. 평상시에도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朱愛寶)가 젓는 놀잇배를 타고 호수 위에서 하루를 보낼 때도 많았다. 주아이바오는 5년여나 부부로 위장해 김구를 보살폈다.

1932년 여름 자싱역에 일본의 밀정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 경찰이 김구의 종적을 탐지한 것이다. 위험이 다가오자 추푸청은 김구를 자싱의 남부 하이옌(海盐)현에 있는 차이칭이란 별장(載靑別墅)으로 옮기게 했다. 그곳은 추푸청 큰 아들의 처가, 곧 사돈의 별장이었다. 이곳 역시 김구 피난처라는 이름의 유적지로 보존돼 있다. 차이칭 별장은 메이완가에서 남쪽으로 35㎞가량 떨어져 있다. 하이옌의 난베이후(南北湖)가에 있다. 난베이후는 산과 강과 호수가 어우러진 관광지다. 우리 정부는 1996년 추푸청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가족들에게 훈장을 전달했다. 독립운동의 동맹에 대한 감사 표시다.

*붙임: 지난호 ‘대한독립운동 중국 현지 답사기2’ 기사의 ‘육사의 가계도’ 가운데 육사의 외삼촌 허규의 큰아들은 ‘허화’가 아니라 ‘허엽’으로 바로잡습니다.

윤태옥 - 중국 인문 다큐멘터리 전문 제작자. 2006년 <다큐멘터리 인문기행 중국(7부작)>(MBC플러스)을 기획, 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매년 6개월 정도 중국을 여행하면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거나 중국 문화와 역사에 관한 글을 쓴다. 저서 <개혁군주 조조 난세의 능신 제갈량> <중국식객> <중국민가기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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